영문도 모르고 태어났다가 어쩔 수 없이 살다가 까닭도 모르고 죽는다는 게 인생이라지만 나이가 50대 중반이라서 그런지 주위 분들의 부고를 자주 받는다. 최근 병문안을 다녀왔던 분이 오늘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았다. 수년 전 세금사건을 해결하면서 인연이 된 분이었는데 최근 병세가 위중하다는 사모님의 전화를 받고 병원에 찾아간 적이 있었다. 의식이 희미해서 사람을 잘 몰라본다고 하셨는데 대뜸 나를 알아보셨다. 무척 반가워하셨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으시고 와줘서 고맙다고 연신 말씀하셨다. 얼굴에 살이 빠지지도 않았고 손을 잡은 악력이 강해서 금방 돌아가시지 않겠다고 느꼈는데 결국 오늘 돌아가셨다.
젊은 날 죽음이 화두였던 적이 있었다. 죽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도대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진짜 지옥과 천당이 있는지? 산 사람이 영가천도를 해주면 죽은 이에게 도움이 되는 건지? 등등 가장 단순한 의문을 가져보았다. 지금도 그 의문은 똑같지만 최소한 ‘죽으면 끝이지’라는 생각은 않는다. 분명 보이지 않는 세계가 더 크다는 것은 확실히 느낀다.
사람과의 인연은 참 상대적이다. 그분은 나를 좋게 생각해주셨다. 생전에 나를 고마운 사람이라고 자주 표현을 하셨다고 사모님이 말씀하셨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사람이 죽기 전에는 생전에 좋아했던 사람은 만나보고 싶어하는 것 같다.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찾아오면 의식이 없다가도 사람을 알아본다고 한다. 작년 연말에 돌아가셨던 분도 그랬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전화 목소리가 너무 힘들면서도 “만나고 싶은 사람 목소리는 듣고 싶어서요.” 라고 하셨다. 죽음을 예견하면 내가 볼때 분명코 마무리하고자 하는 게 있어 보인다. 사람과의 인연이 가장 큰 것 같다. 계산을 하는 인연이 아니라 순수한 인연에는 마음을 전달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2008년 ‘찾지 않아도 있는 것을’ 책서문에서 죽음과 인생에 대한 고민을 적어본 적이 있었다.
고성춘 변호사 저
도서출판 청보
어느 덧 불혹의 나이를 넘어 중반으로 접어들었다. 젊은 시절이 불과 엊그제 같다. 앞으로는 더욱 그럴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요즈음은 가끔씩 ‘아! 이래서 인생이구나.’ 라는 느낌을 가지곤 한다. 꼬인 것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풀어지고, 감춰진 것은 저절로 드러나게 돼있다. 애증(愛憎)의 세월이라는 말처럼 애와 증이 반복된다. 그동안의 공직생활(감사원, 국세청)을 통하여 많은 사건을 대하면서 느낀 것 중의 하나가 ‘사건은 반드시 흔적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건 속에는 그 사람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사건도 이러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구태여 염라대왕 앞에 불려가 업경대를 볼 필요 없이, 살아생전에도 그동안 살아온 시간을 뒤돌아보면 마음 쓴 흔적은 고스란히 그 자리에 남아있다. 시간은 지나가버렸기 때문에 손에 잡히지는 않아도 그 흔적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다.
잘되고 싶은 마음, 인색했던 마음, 순진한 마음, 남에게 감추고 싶은 마음 등등. 모든 죄는 마음으로 짓는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참회가 필요하다. 그것도 진실한 마음으로 ….
그런데 사람이 살면서 과연 진실한 마음을 가지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다보면 나 자신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간다. 그리고 건강도 ….
누구나 다들 열심히 산다. 한 직급 올라가기 위해서 또는 돈을 벌기 위해서, 또는 어떤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살줄만 알았지 내 건강이 해치는지, 내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는지를 실감하지 못하고 산다. 나이에 비례해서 병문안도 가고 상가에도 가는 횟수가 늘어난다. 그럴 때는 이런 생각도 든다.
‘어차피 하루 세끼 먹고 사는 것, 한 번뿐인 인생! 이렇게도 살고 저렇게도 사는데, 뭐에 얽매여 구태여 살 필요가 있는가? 훌훌 털어 버리고 진짜 인생의 주체로서 한번만이라도 자유롭게 살고 싶다’
그러나 마음만 그렇지 현실로 돌아오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규격에 맞춰진 대로 바쁘게 살아간다. 다시 소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한 번뿐인 소중한 인생이기 때문에, 진짜 내가 주체가 되어 자유를 느끼면서 살고 싶지만 그게 마음만 그렇지 실제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 한 편으로는 항상 갈망한다. 그 에너지는 꺼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만족을 느끼기가 어렵다.
그런데 자기만족이라는 것도 결국 자기 자신에 달려 있는 것 아닐까? 환경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으로 지옥도 만들어내고 천당도 만들어내고 육도(지옥 아귀 수라 아수라 천상 인간)의 여러 세계를 만들어낸다.
한마음을 쓰는 경우와 두마음을 쓰는 경우, 흔적은 어디에 남을까?
먹고 사는 것이 직업이라지만 그야말로 먹고살다 끝나 버리기에는 너무 아쉽다. 내 하는 일을 통해서 남을 이롭게 할 수 있으면 복전을 일구는 일이다. 네 잎 크로버만을 찾다가 세 잎 크로버를 짓밟는 우(遇)를 범하는 것이 평범한 모든 사람들이라 하지만, 이제는 그런 어리석음을 더 이상 범할 여유가 없다는 것을 느낀다.
마음에서 시작해서 마음으로 끝나는 것 같다. 인생의 주체로 살고 싶고, 또 자유를 원하지만, 그런데 그게 배짱 없이 되겠는가? 나 잘되기 위해 또는 나 편하기 위한 마음으로는 내가 만들어 놓은 규격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나라해서 특별난 삶을 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본다. 세상살이가 그만큼 힘들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게 자기 마음대로 된다면야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 가정을 꾸리고 가정의 평안을 지켜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인생은 각자 살아가고 있다. 인생의 주체는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결국 마음의 흔적을 많이 남기지 말고 마음을 진실 되게 쓰고 싶다. 나이가 먹어서 더 순수해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게 인생이기도 하다. 쏜살 같이 지나가는 세월에는 항시 무상함이 묻어있으니 이를 경계하고 또 경계하면서 인생의 주체로서 자유를 느끼는 한 생이 되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