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라는 말을 생전 처음 마음으로 깊이 느껴 봤던 때가 있었다. 고시 합격하기 직전의 해였다.
집에서만 공부하던 어느 날이었다.
어느 분으로부터 소포가 왔다. 책이었다.
다른 때와는 달리 유독 그 순간, 그분에 대한 고마움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 책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평소 잘 듣던 천수경 테이프를 틀었다.
“정구업진언 수리수리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처음 시작하는 이 부분을 독경 소리에 맞춰 따라하자마자
갑자기 속에서 어떤 기운이 꿈틀거리더니 눈물이 솟구쳤다.
그리고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하염없이 ‘목 놓아 운다’는 말의 느낌을 실감하였다.
참아야지 하면서도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다 보니 내 의지로 어떻게 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침 집에 아무도 없었기에 다행이었다.
엄청 큰소리로 울었기 때문이다.
울음이 그쳤을 때는 얼마나 시원했는지 모른다.
마치 태풍이 지나간 후의 맑은 바람이 부는 것처럼.
나 자신이 무척 깨끗해지고 가벼워졌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해, 그렇게 참회를 했어도 또다시 떨어졌다. 아예 2차 시험
길목에도 못가보고 1차 관문에서 떨어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해 떨어졌을 때의 느낌은 예전과는 전혀 달랐다.
실망은 원시적인 감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의 기분은 참 묘했다. 더 이상 고시라는 개념이 내 몸에서
한 점도 없이 남김없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는데, 어찌나 시원하고
후련하던지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동안 죽자 살자 매달려왔던 고시라는 개념 자체가 흔적없이 사라져버렸다.
뇌리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뭔가 내 몸 안에 ‘고시’로 대표되는 개념, 즉
“경쟁”과 “잘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부터 해방되는 기분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개념은 어떤 생명체인 것 같았다.
내 몸안에서 살다가 어느 순간 더 이상 기생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동안 악착같이 나를 부려먹고 경젱을 하게하고, [된다. 안된다]는 개념에 똘똘 사로잡히게
만들어 마음도 인색하게 쓰게 하고, 외줄 하나에 대롱대롱 매달린 것으로 착각하게 하여
잘되고자 하는 본능에 집착하도록 하더니 이제야 자기 스스로 뻐져나가니 어찌나 가슴이
쏴하고 후련하던지 달리 표현을 못할 뿐이다.
업장소멸이라는 말을 그때 실감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 다음 해에 1차와 2차를 동시에 합격하였다.
이런 이야기를 정리하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세계가 분명 크고, 그 세계의 원리에 의해 보이는 세계가 형성되므로
주객이 전도되는 오류를 범하지 않아야겠다는 것이다.
형상에 속지 말고 본바탕을 보아야 하느님도 보고 진리도 보고
삶도 넉넉해지고
여유가 생겨 즐거워지고 행복해진다고 한다.
거울 속의 그림자가 아무리 형형색색, 울긋불긋하다고 해도 그 실체는 공허하다.
그 동안 그 그림자가 허망한 그림자임을 알지 못했으니 착각 속에
살았던 것이다.
보이진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할 것인가?
우리는 한 생을 살다가 가지만 결국은 세세생생을 유전하는 이유는
심연 즉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한 생만을 생각하고
잘되고자 집착하면서 남의 마음에 고통을 주는 것은 오히려 손해이다.
특히 공직자들이 나 자신의 안일을 탐하게 되면
그 파급은 국민 전체에게 미치니 공직은 아무나 수행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