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진실패 소중한 발견] 2 용한 점쟁이는 과연 누구?
수험생이라면 부적 한 두개 정도 몸에 지녀본 경험이 있으리라고 본다. 나의 경우도 그랬다. 다만 남들보다 시험에 떨어진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한번씩 떨어질 때마다 새로운 부적으로 교체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님의 정성이 대단했던 것 같다. 어디서 그렇게 부적을 구해오는지.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님의 정성이 느껴졌기 때문에 몇 년 동안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내 몸에 부적이 없었다. 실제로 합격하던 해에도 없었다. 진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수험생을 둔 부모라면 자식의 합격을 위해서 무언들 못하겠는가. 할 수만 있다면 시험까지도 대신 봐줄 심정이기 때문에 용하다는 부적이라면 돈이 비싸더라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용한 부적을 나만 지니고 있으면 모르되 다른 모든 수험생들도 지니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결국 조건이 똑같게 된다. 오히려 부적이 없는 수험생이 더 빛나 보인다.
점을 보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답답하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마음에 점을 보러가지만 점을 본다는 것은 득보다는 실이 많다. 지금은 고시공부를 포기한 선배 한 분의 이야기이다. 그분과 함께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가 앉았더니 대뜸 선배에게 하는 말이 있었다.
“자넨 공부해도 안 돼.”
선배는 자기감정을 감춘 채 끝까지 말을 듣고 나왔지만 그 말을 들은 선배의 기분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갔다. 결국 그 선배는 고시를 포기하였다.
그러나 점쟁이 말대로 맞아 떨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볼 때는 그에게 합격할 만한 끈기나 인내심이 부족하여 떨어진 것이었다. 바로 옆에서 같이 공부했던 사람이 본 것이라서 점쟁이보다 더 정확할 것이다. 사람의 말이라는 것이 한번 내뱉으면 파장이 그 순간으로 끝나지 않고 피를 타고 돌고 돌아 며칠 아니 몇 달을 가고 심지어는 죽을 때까지도 따라다닐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점을 본다는 것은 이와 같은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험을 앞두고 있는 수험생 부모입장에선 머리 싸매고 힘들어하는 자식을 보면 시험을 대신 봐주고 싶을 정도로 측은해보이고, 오히려 당사자보다도 더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음식을 먹이고도 싶고, 보약을 해주고도 싶고 그 외 여러 가지 힘닿는 대로 다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부적을 구한다든지 점을 보는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그러니 자식들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절이든 교회든 찾아가서 부처님이나 하느님에게 자식이 잘되도록 손이 닳도록 빌고, 무릎이 까질 정도로 절을 하고 싶은 마음이다. 비록 체력이 따라주지 않아서 못하지만 말이다. 교회나 절을 찾는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아마 자식 때문에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다보니 종교시설도 나름대로 수험생과 부모를 위한 기도회 또는 기도법회라는 행사를 치르곤 한다. 하다못해 어떤 곳은 수험생을 위한 부적을 만들어 파는 곳도 봤다. 그러나 그게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내 자식 합격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지 ‘남의 자식도 같이 합격하게 해 주세요’라고 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시험이라는 것이 내가 합격하면 누군가는 떨어지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의 고통을 내 아픔처럼 여기는 부처님이나 하느님이 과연 그 소망을 들어줄까?
설령 부처님이나 하느님이 감응을 보인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이른 새벽 동이 트기전의 어둠 속에서 날마다 종교시설을 찾아서 기도한다는 그 자체가 대단한 정성이고, 그게 날마다 이어지면 기도하는 사람 자신의 마음이 평안해지면서 자식에 대한 기대로 인한 마음의 불안으로부터 점점 벗어나게 된다. 그러면 그 파장을 자식이 느끼는 것이고, 자식 역시 부모의 그런 정성 때문에 마음의 위로를 받게 된다. 수험생은 예민한 심리에 의해 극과 극을 달릴 수 있기 때문에 잔잔한 바다를 보면서 울적하고 답답한 마음을 털어내듯이, 부모가 잔잔한 바다가 되어 수험생인 자식에게 위안을 주어 공부가 잘되게 한다면, 그게 부처님이나 하느님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부모 스스로 집착을 놓아야 한다. 마음의 평안을 느끼고 영감을 얻으면 그 파장이 자식에게 간다. 자식의 마음도 평안해야 공부가 잘 되는 것이다. 본성을 거스르는 어떠한 것도 귀찮고 짜증나는 일이다. 시비를 가리는 일이 특히 더 그렇다. 부모 스스로 마음의 평안함을 찾아야 한다. 그 방법으로는 마음을 완전히 이완되게 한다. 기도나 참선 모두 몰입해버리면 두려움, 불안, 노여움 등의 구름들이 걷혀지는 느낌을 받는다.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간단하다.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해 힘쓰는 것이 결국 모두에게 평안함을 준다.
진리가 냉정하듯이 시험도 냉정한 것이다. 공부를 열심히 해도 떨어지는 수험생이 있는데 하물며 그렇지 않은 수험생이라면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털끝만한 요행을 바란다는 것은 이른 봄에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합격은 합격할 만큼 공부를 얼마나 진실 된 마음으로 열심히 했느냐에 달려있지 신비한 어떤 효험에 달려있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진짜 용한 점쟁이는 합격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말 한마디를 부적같이 몸에 지니고 다닌다면 분명히 그 효험을 볼 수 있다.
다음은 운명에 대한 성철스님의 말씀이다.
인과(因果)가 있을 뿐이지 결정적인 운명은 없습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우주의 근본법칙 그대로이지요. 모든 결과는 노력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결과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힘써 노력하면 좋은 결과는 자연히 따라옵니다. 여기에 큰 자유의 원리가 깔려 있어요. 어떤 분은 결과가 원인에 반비례하는 일도 있다고 할지 모르나 이는 노력이 부족한 탓이지 운명은 아닙니다. 자력(自力)을 다했을 때 타력(他力)이 나타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