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독 공부장소를 가지고 시달렸다. 마치 내 몸 안에 누군가가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경건한 분위기를 좋아했고, 자신을 조용한 정적 속에 침잠시켜 주기를 원했다. 사람 만나는 것도 싫어하고 혼자 조용히 자연 속에서 지내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달래주지 않으면 변덕을 부리고 힘들게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누구나가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을 때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어느 장소를 간들 누가 나를 반겨줄 것이고, 내 마음에 맞는 장소가 있을 수 있겠는가? 남들 하는 대로 같이 묻혀 잡담도 하고 술도 같이 마시고 놀기도 같이 하면 되는 것이 오히려 더 나아보였다. 그러나 그런 것을 싫어했으니 고생을 사서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내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어느 한 매듭을 지어준 분이 혜정스님이다. 스님을 처음 보았던 때가 1991년 스물일곱 살 때였다. 경주 기림사에서였다. 그 절을 가게 된 계기는 단전호흡때문이었다. 대학교 때 국선도를 가르쳐주던 사람이 스님이 되어 있는 것을 우연히 TV에서 보고 큰 맘 먹고 찾아갔었다. 그를 처음 본 때가 대학교 4학년 때였다. 청학동 사람처럼 댕기머리에 한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을 우연히 학교근처 하숙집 앞에서 자주 보게 된 것이 계기였다. 하숙집에서 밥 먹다가 그 사람이 화제에 오르곤 하였다. 과연 뭘 하는 사람인지 궁금하였다. 그런 의문이 얼마 안 되어 풀렸다. 그는 단전호흡을 가르치던 사람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국선도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만 해도 사회 환경이 데모다 뭐다 해서 사람들이 이목이 다 외부로 집중되고 내면적인 그런 것에 무심한 시대다 보니 단전호흡 같은 것에 사람들의 큰 관심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 왠지 관심이 끌렸다. 관심만 가지고 하루 이틀 미루다가 어느 날은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해보고 나서 그 도장에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하숙집 후배도 같이 다녔다. 하숙집에서 5분도 채 안 되는 거리이다 보니 거의 날마다 빠지지 않고 다녔다. 약 1년 정도 꾸준히 다니다보니 허리에 차는 띠의 색깔도 바꿔지게 되었지만 다음해 2차 시험 볼 때까지만 다니다가 결국 다니지 않게 되었고 군대 다녀온 후 그 도장은 어디로 이사하고 없었다. 그러던 중 그 사람이 경주 기림사의 암자에 있는 것을 알고 찾아간 것이었다. 그 암자에는 국선도 단전호흡을 하다가 출가한 세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는 출가해서도 염불에는 전혀 관심 없고 단전호흡에만 집착하였다. 혜정스님은 법당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근데 벙어리였다. 말을 못하고 손짓만 하였다. 다른 한사람은 덩치가 컸는데 지금은 티베트에서 수행하고 있다고 한다. 암자는 방 세 칸에 부엌 하나가 있는 요사채와 찌그러진 법당 하나였다. 마당에는 오래된 보리수 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그와 같은 방을 쓰면서 하루에 14시간씩 단전호흡을 예정된 기간인 일주일동안 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요즘 유행하는 흑마늘을 만들어 먹었다. 장작불에 육쪽마늘을 일정시간 구우면 흐물흐물해지는데 그때 꺼내가지고 당시 유행했던 인산죽염에 찍어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었다. 그는 처음 먹는 사람은 조금씩만 먹어야 한다고 하면서 나에게 몇 쪽만 주곤 하였다. 마늘이 건강식품으로 인기가 있는데 단지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자극에 예민해진다는 것이다. 몸의 기운은 불끈불끈 솟아올라올 수 있지만 외부의 사소한 자극에도 예민해 질 수 있다는 점이다. 경주시내로 버스가 들어가자 창문 밖으로 보이는 아가씨의 모습에 이상하게도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이래서 절집에선 오신채를 먹지 말라고 했던가 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뒤로 한 번 더 갈 기회가 있었다. 이제 곧 서른 살을 목전에 두고 있다 생각하니 20대 청춘이 속절없이 가는구나 라는 초조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성취한 것 없이 죽으라고 시험공부만 하다 30대로 들어서야 한다는 게 너무 비극이었다. 마음이 심란하고 착잡하였다. 그러다보니 한 가지 떠오른 망상이 있었다. 아, 영원한 것을 하고 싶다. 떨어지면 헛된 노력으로 끝나는 고시 같은 유한한 것 말고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영원한 뭔가를 하고 싶었다. 차라리 내가 법대를 안 갔더라면 어쨌을까 하는 후회가 들기도 했다. 내가 나이가 들어도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품게 되었다. 내가 처한 현실에 강한 구속감을 느낄 때마다 일탈을 꿈꾸는 게 자연스러웠던 것 같았다. 마음이 답답할 때는 어떤 탈출구를 찾게 마련인데 그 당시 나의 탈출구는 기림사에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만큼 사람이 단순하였다. 이성보다 감성이었다. 조그마한 빛이 들어오는 쪽을 향해 간 게 단전호흡이었다. 두 번째 갔을 때는 마침 그 스님은 없고 혜정스님만 있었다. 절이라는 게 반겨주는 사람이 있어야 편한 곳이지 반겨주는 사람이 없으면 썰렁하기 그지없는 곳이다. 그래서 도착한 그날로 미련 없이 다시 발길을 돌렸다. 관광하러 온 것이 아닌 이상 머물 이유가 없었다. 서울에서 경주까지 오려면 7시간 이상이 걸렸다. 또 거기서 감포 가는 버스를 타고 오다가 기림사에서 내려 택시나 도보로 걸어 들어와야 했다. 서울을 가려면 빨리 서둘러야 했다. 그런데 혜정스님이 헛걸음을 한 채 그냥 나가는 나를 안쓰럽게 보았는지 자기도 밖에 나갈 일이 있다면서 손짓을 하며 따라나섰다. 종무소까지 같이 걸어 나오다가 잠깐 기다리라고 손짓을 하더니 종무소 안에 들어가더니 하얀 봉투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그 봉투를 나에게 건넸다. 여비하라고 돈을 준 것이었다. 몇 만원인 걸로 기억된다. 그때만 해도 한 달 하숙비가 11만원인 때였다. 스님에게는 몇 만원이 큰돈이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받을 수가 없어 사양했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말없이 받으라는 손짓만 하였다. 말을 못하는 벙어리임에도 불구하고 마음 써주는 게 너무 고와보였다. 마음한구석으로 너무 고마웠다. 그 돈의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나는 남에게 베풀어 본적이 없는데 이런 사람들은 이렇게 베풀면서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나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해주니 너무 고마웠다. 세상살이에서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는 마침 절에 들어왔던 택시를 돌려세워 나를 태우고 버스 타는 데까지 같이 갔었다. 나는 택시 안에서 그에게 나의 고민을 물어보았다. 당시 나는 단전호흡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단전호흡 수련을 집중적으로 해볼까도 생각하였다. 고시는 해봤자 유한한 것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실패한 사람에게 당연히 드는 느낌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는 영원한 것을 추구하자는 식의 생각이 어느 순간 뇌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내 고민을 듣던 혜정스님은 손가락으로 산을 가리켰다. 그리고 단전 쪽에 두 손을 대고 호흡하는 흉내를 내더니 오른 손으로 허공에다 X 자를 그렸다. 그런데 그 순간 희한하게도 그동안의 갈등과 고민이 한순간에 깨끗하게 해결되는 기분이었다. 스님의 딱 세 동작으로 모든 고민이 한순간에 눈 녹듯이 녹아 없어져버렸다. 갈등의 칡넝쿨이 싹둑 잘라지는 느낌이었다. 그 뒤로는 단전호흡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어졌다. 지금생각해보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대체로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되면 그 길로 계속 빠져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냥 지나가게 놔둬버렸기 때문이다. 선방수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어떤 경계가 오더라도 헛것이다 생각하고 붙잡으려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맛을 다시 보고자 붙잡으려고 하면 공부와 영원히 멀어진다고 한다.
당시 혜정스님과 헤어지는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억에 남아있다. 그는 감포 쪽으로 가야 했고 나는 경주 쪽으로 가야 했다. 경주 가는 버스가 먼저 오자 인사를 하고 먼저 올라 자리에 앉아 차창 밖으로 내다보았다. 그는 상점 앞 평상에 허리를 꿋꿋하게 편 채 좌선하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나중에서야 혜정스님이 벙어리가 아니라 3년 묵언정진기도를 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어쩐지 뭔가 달라 보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