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정현주 전 사장 형사법정 최후진술
존경하는 재판장님
어느덧 1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난해 8월 11일, 이명박 대통령은 공영방송 사장이던 저를 참으로 구차스러운 방법으로 해임했습니다. 잘 알려진대로, KBS 사장 하나 잘라내기 위해 검찰, 감사원, 국세청, 방송통신위원회, KBS 이사회 등을 총동원했습니다. 그러면서 현저한 비리가 있다느니, 무능경영이라느니, 인사전횡이라느니 하는 따위 인격적 살해까지 서슴치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잔인했습니다.
해임위해 권력기관 총동원
<중간 생략>
검찰의 수준 보여준 공소장
“공사의 특수성으로 인해 추계조사 방법에 의한 세액 재산정 가능성도 거의 없어” “당시 공사가 상급심에서도 승소가능성이 매우 높아…” “소송을 취하할 아무런 합리적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액 재산정 가능성이 거의 없다”니요. 검찰은 확률로, 또는 심증으로, 사람을 체포하고, 구속하고, 기소합니까. 검찰이 저를 배임죄로 엮으려면 ‘거의’가 아니라 ‘100%’ 세액 재산정 가능성이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법정에서 전율스러운 순간이 있었습니다. KBS와 부가세 조정에서 실무 책임을 맡았던 고성춘 당시 국세청 법무2과장 법정 증언 때였습니다. 고성춘 증인은 검찰 조사 때, KBS에 대한 재부과 여부와 관련하여 그것이 ‘불가능하냐, 현실적으로 어려우냐’를 가지고 무려 4시간 동안 씨름을 하면서 시달렸다는 증언을 했습니다. 검찰은 ‘불가능’을 원했지요. 그래야 배임죄를 뒤집어 씌울 수 있을 테니까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은 국세청의 세금 재부과가 어렵기는 하겠지만 방법을 찾는다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가 있는 것이니, 배임 적용은 근원부터 성립될 수 없는 것이지요.
국세청 법무과장 지낸 사람을 불러다 참고인 조사를 하면서 그 한 가지 문제를 가지고 4시간이나 닦달을 했다고 하니, 이게 기본 틀과 방향을 죄다 미리 정해놓고 하는 표적수사, 기획수사, 정치수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핵심 쟁점은 국세청의 재부과 여부
국세청 직원도, 국세청의 소송대리인인 김앤장의 권은민 변호사도, 법률회사 율촌의 법률자문에서도, 경수근 변호사의 수임료 소송 판결을 내린 재판부도, 심지어 사장 재임시 저에게 그토록 적대적이었던 강동순 KBS 감사 시절, KBS 감사실이 독립적으로 취한 법률회사 태평양과 다인의 자문에서도, 국세청이 재부과를 할 것, 또는 법원의 확정판결 이후에도 정당한 과세표준 및 세액 계산과 관련한 다툼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라고 했는데도, 검찰은 유독 그 많은 수사자료와 증거들을 철저히 외면하고 무시했습니다.
더구나 1심 판결에서 KBS의 주장은 틀렸다, 과세관청의 과세방법도 틀렸다, 추계과세 방법으로 재부과할 수 있다는 판결까지 나와 있는데, 그럼 국세청은 손을 놓고 스스로 존재이유를 부정한 채 징수권을 포기할 것이라고 검찰은 진심으로 믿었습니까. 아니면 고발인의 논리에 의존하여 표적수사, 기획수사, 정치수사를 한 것 아니었습니까. 사장 해임하는데 필요한 원인제공 만으로 임무를 완수했다는…
<중간 생략>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지금도 국세청과 KBS 사이의 조정안이 양 당사자의 입장을 잘 반영한 가장 합리적이었다는 점에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 그랬기에 법원도 조정을 권고한 것 아니었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분명히 공영방송 KBS의 안정적 운영 뿐 아니라 상당한 절세효과를 가져오는 최선의 현실적 선택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도 의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KBS가 법원의 조정을 통해 세금 문제를 해결한 것은 구조적 한계 속에 놓인 KBS 재정상황에서 KBS에 엄청난 부담과 압박이 되는 과세관청과의 끝없는 소모적 분쟁을 종결짓고, 합리적인 과세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그래서 공영방송 KBS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경영적 판단에 따라 취해진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경영적 판단과 경영 행위를 두고, 국세청의 재부과 가능성까지 원천적으로 부정하면서, 심지어 국가와 국민에 이득을 줬다는 이유로, 저에게 무시무시한 배임죄를 적용했습니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어떻게 이런 일이 법의 이름으로 가능합니까. 정치적 목적 이외에 달리 무엇으로 설명이 가능합니까.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현 주소입니다.
검찰의 포괄적 권력 남용을 지금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는 곳은 법원이며, 그래서 법원의 역할과 책무는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하다고 봅니다. 저는 지금도, 역사의 시계가 몇 십 년 전으로 역류해 버린 지금의 이 참담한 현실에서도, 우리나라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희망과 낙관, 믿음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실패와 패배조차도 역사 발전과 사회 진보에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다는 낙관을 저버려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는 참된 것과 옳은 것을 위해, 민주주의 가치와 인간 권리를 위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몸을 던지고, 헌신하고, 희생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법정에서도 그런 희망과 믿음과 낙관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 확인될 것이라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2009.6.22
정연주
정연주 전 KBS 사장의 최후진술을 우연히 뉴스에서 보고 그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구구절절이 애통하다는 느낌이 든다. 내 이름이 그의 최후진술에 거명되리라고는 전혀 예상 못한 뜻밖의 일이다. 한편으로는 그럴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2008년 8월 7일 서울중앙지검 형사부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고 나오니 12시가 조금 못되는 시간이었다. 마치 내 마음을 위로라도 하듯이 보슬비가 처량하게 내렸다. 그 때 그 순간 마음 속에 떠오르는 느낌이 있었다.
“남을 위해준다는 마음만 먹어도 하느님이 예뻐해주겠구나.”
그런 마음 먹는다는 것만 해도 너무나 희소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그 당시 적어놨던 글인데 시절의 인연이 된 것 같기에 글을 올리고자 한다.
몇 달 전의 일이다. 2008년 7월 여름이었다.
전 KBS 사장에 대한 업무상배임죄 수사를 담당하고 있는 서울중앙지검 조사부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담당 수사계장이 전화로 출석을 요구하였다. 떡 주는 데도 아닌데 그런 곳에서 오란다 하여 어느 누가 선뜻 가고 싶겠는가?
서면조사를 요구하려고 하다가 어차피 한번 겪을 일이라서 한 번 가보기로 하였다.
서울지방국세청 법무2과장으로 있으면서 KBS 소송사건 중 부가가치세 사건을 조정하였기 때문이다. 법무1과에서 주로 법인세 사건을 가지고 조정을 했는데 나중에서야 부가가치세까지 조정을 일괄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담당자로서 참고인 조사에 응한 것이었다. 무슨 죄 지은 것도 없으니 떳떳하게 응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나만의 순진한 생각일 뿐이다.
상대방이 거칠게 나오면 기분이 나쁠 뿐이다.
참고인 조사이므로 그야말로 참고인의 진술을 듣고자 해야함에도 자신들이 듣고싶어 하는 말을 하도록 유도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서로 언쟁이 있을 수밖에 없다.
마음에 안 드는 대목에서는 수사관의 얼굴이 붉어진다. 검사 역시 마찬가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법연수원 동기이다.
나름대로 예우를 갖춰준 것 같아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사건과 관계없는 사적인 질문까지 해대는 계장을 보면서는 ‘우째 이럴까’였다. 마음이 상하였지만 대응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해봐야 들을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한 번은 큰소리를 내면서 “참고인에게 그렇게 윽박지르면서 조서를 받으면 되느냐.”라고 하기도 하였다.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부족한 사람을 보면 한 번씩은 그럴 필요가 있다. 8시간의 조사를 받았지만 실상 한 시간 정도면 충분할 것을 이리저리 삥삥 돌리면서 자기가 원하는 답을 얻고자 실속 없는 질문들을 하느라 시간을 보낸 느낌이었다.
나 역시 감사원에서 감사를 해보고, 검찰시보하면서 특수부에서 수사를 해보기도 하였지만 결론은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하는 사람이 무섭다는 것이다. 큰소리로 상대방을 윽박질러봤자 자기 이해부족이고 자기가 원하는 구도가 만들어지지 않는 능력부족의 표현일 뿐이다.
‘누가 나를 소라하면 ‘음매’해주고, 말이라고 하면 ‘히이힝’ 해줘라’라는 성현의 말씀대로 웬만하면 사람들과 각을 세우지 않고 싶다. 그 수사계장에게도 여러 번 말했다.
“인연이 있어 만났으니 인연대로 또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존재가 달라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보고 “만일 변호사님이 KBS 사장이라면 조정을 했겠습니까?”라고 의견을 물어봤을 때 해준 말이 있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합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그 존재에 있어보지 않았는데 그 사람의 입장에서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무슨 말인지 의아해하는 수사계장의 눈이 똥그래진 모습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조사가 다 끝나고 검사에게 한 말이 있었다.
“나는 한 번으로 지나가버리지만 검사님은 업으로 이 일을 해야 하니 힘드시겠습니다.”
“맨날 하는 것인데요.”
답답한 마음 그지없었다.
그날 밤 11시에 검찰청을 나왔을 때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두운 밤하늘,
가로등 불빛에 비친 빗줄기가 착잡한 내 심정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그순간 나는 온몸으로 느꼈다.
‘사람이 남을 위해준다는 마음만 먹어도 하느님은 분명 예뻐해 줄 것이다.’
중생이 그런 마음이라도 먹는다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