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가는 과정] 곡성 태안사에서의 체험 1
가게 된 이유
내가 태안사를 가게 된 이유는 딴게 없다. 왠지 한번 가보고 싶었다. 1996년 사법시험 2차까지 치른 후인 8월쯤이었다. 시험발표를 기다리면서 인천 용화선원에 시민선방이 있다는 혜정스님의 말을 듣고 발표 때까지 거기에 가있으려고 했다. 그런데 왠지 곡성 태안사를 거쳐서 가고 싶었다. 마음속으로는 일주일정도만 있으려고 했다. 아무런 인연도 없었다. 광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곡성 태안사가는 버스를 타고 약 1시간정도 가면 태안사 입구까지 갈수있다. 바로 거기가 종점이었다. 태안사입구에서 절까지는 오솔길이 약 1km 정도 놓여있었다. 나무들도 울창했다. 길옆으로는 계곡이었다. 화엄사처럼 물이 철철 넘치는 계곡이 아니라서 수량은 적었다.
이 절을 가보고 싶었던 이유는 청화스님이 그곳에서 공부하신 곳이라서 한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청화스님은 그 곳 조그만 집에서 살면서 다 쓰러져가는 절을 새롭게 불사까지 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다고 했다. 옥과 용주사에 있을 때 옆방에 있었던 효주보살이 그 이야기를 해줬다. 청화스님이 법문하는 날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다고 했다. 옥과 용주사에 있었을 때 스님들을 따라서 나도 가본 적이 한번 있었다. 주지스님이나 무여스님이 그 쪽 문중이라서 청화스님이 법문하는 날에는 다 모였다. 따라서 나도 바람쐴 겸 따라갔었다. 법문을 해도 다 듣지는 못했다. 그냥 그 분위기를 즐길뿐이었다. 그러다 귀에 들어오는 소리가 있으면 마음 깊이 저장해놓기도 했다.
태안사 경내로 들어왔다. 절만 있지 아무도 없었다. 건물들은 모두 고풍스러웠다. 종무소 현판이 있는 조그만 기와집 마루에 앉았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절 경내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멀리 두 사람이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보살들이었는데 한사람은 나이가 있었고 한사람은 젊은 아가씨였다. 나이가 들어보이는 분에게 원주스님을 뵙고 싶다고 말했다. 절에서 살림을 맡아하는 사람이 원주스님이었다. 군대로 보면 인사계였다. 그분이 하는 말이 이 절에는 원주가 없고 그 대신 내가 하고 있는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이 절에서 약 일주일정도 기도 좀 하고 싶습니다.” 그 분이 이런저런 말을 건네면서 긍정적으로 대답을 해줬다. 그렇게 해서 그 절에 있게 되었다. 마침 그절에는 대원스님이라는 내 나이 또래의 젊은 스님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하안거 해제 이후 동안거까지의 사이에 백일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 날 저녁예불부터 들어갔다. 그리고 열심히 또 절을 했다. 전공이 절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기도가 끝난 후 그 스님에게 공손히 합장을 하고 인사를 드렸다. “고성춘이라고 합니다. 기도를 하려고 왔습니다.”그 분도 호감있게 나를 대해줬다. 그렇게해서 그 스님과 그 보살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하루나 이틀정도 지났다. 아침공양을 하면서 느낌에 주지스님 같은 분이 들어왔다. 직감이 맞았다. 원래 남의 집에 머무를 때는 그 집의 어른에게 인사를 하는 게 예의였다. 그런데 나는 깜빡했다. 공양이 끝난후 원주 소임을 보던 보살에게 주지스님에게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분도 주지스님에게 인사를 시켜야하는데 아차 했다고 했다. 주지스님이 있는 곳은 법당 뒷편에 있었다. 아늑하고 좋은 곳이었다. 방으로 들어가 인사를 드렸다. 그 분에 대한 첫인상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주지스님은 종걸스님이었고 보살은 대원심 보살이었다. 종걸스님은 이름 그대로 걸걸하고 걸식하는 식으로 절을 운영해 나간다고 우스갯소리로 하였다. 선방수좌생활을 많이 했던 분이라고 했다. 그래서 태안사에 있는 선방을 잘 운영한다고 했다. 선방 한 철 나는데 돈이 몇 천만원 든다고 했다. 그러나 태안사는 청화스님있을 때나 번성했지 그 분 떠난 뒤로는 신도들도 별로 오지 않는다고 했다. 신도들이 대체로 스님따라 다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걸스님은 선방을 힘들어도 잘 운영한다고 하였다.
회회당
아마도 그 절에 있던 인연으로 내가 그 후로도 계속 인연이 되는 스님들의 거의 모두를 거기서 만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딱 일주일만 있으려고 했던 것이 일주일이 아니라 거의 세달 가까이 있었다. 泰安寺 의 泰安이라는 말이 큰 편안함을 말한다. 실제 그 절이 그랬다. 그 절에 한 번 들어오면 나가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고 했다. 그만큼 그 절은 편안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책에도 나오는 동리산파라고 하는 게 태안사를 말하는 것이었다. 태안사가 있는 산이 동리산이었다. 신라 때에 선종 구산문의 하나로서 비가 와도 대웅전까지 비를 맞지않고 다닐 수 있을 만큼 건물이 많았다고 한다. 그 절에는 회회당이라는 문화재가 있었다. 건물은 ‘ㅁ’ 자형인데 식당으로 쓰는 큰 방이 정면에 있고 왼쪽 옆면에는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고 오른쪽 옆면에는 단층짜리 방두칸이 있고 뒷면에는 2층으로 되어있는데 이게 운치가 있었다. 1층은 출입문이 있고 문옆으로 방 한 개가 있었다. 그리고 2층에는 방 세 개가 있었다. 천정은 낮았지만 조그마한 창문이 놓여있어서 그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면 절아래 만들어놓은 연못이 보였다. 방바닥은 누런색의 장판이었고 전등도 백열등이어서 밤이되면 운치가 있었다. 적당한 크기의 방이어서 아늑한 맛을 주었다. 조영래 변호사도 병이 들어 이곳을 찾아 내가 묵고 있었던 옆방을 썼다고 했다. 특히 그 건물의 백미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었다. 계단 하나가 큰 고목을 통째로 깍아서 만든 것이었는데 그 계단을 볼 때마다 참 신기했다. 옛 목수의 숨결이 살아있는 것 같았다.
대중공사
어느덧 가을이 되었다. 젊은 사람이 기도 잘한다고 절에 있는 모든 분들이 다 좋아라 했다. 그리고 공양주 보살님들은 뭐 하나라도 더 주려고 하였다. 그 중에도 생각나는 공양주 보살님이 있다. 절 후원에서 공양을 차리는 소임을 보는 분이었다. 처음 그 절에 왔을 때 봤던 젊은 아가씨의 어머니였다. 마을에 집이 있지만 절에서 거의 생활을 하셨다. 딸도 절에서 종무소 일을 보고 있었다. 절집에서 밥을 해준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새벽 3시쯤 일어나서 그때부터 아침공양을 준비해야 한다. 게다가 절에는 제사도 많고, 기도하러 찾아오는 단체손님들이 많다보니 식사준비만 하는게 아니다. 어느날은 딸이 종무소에서 혼자 울고 있었다. 울고 있는 그녀에게 무슨 이유인지를 물어볼 수 없었다. 그 이유를 안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그 절은 선방을 운영하였는데 스님들이 공양을 하다가 돌을 씹는 경우가 여러번 생겨 불평이 오고갔던 모양이었다. 스님들이 공양하다가 밥에서 돌이 나와 이를 상하면 몸이 전부인 스님들 입장에선 짜증이 날 법도 할 것이다. 스님들의 불평을 주지가 후원을 책임지고 있는 원주에게 하였고 그가 후원보살들을 모아놓고 한소리 하였던 것이었다. 그녀는 나이도 연로한 그의 어머니가 어린 사람으로부터 꾸지람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 마음이 아팠던 것이었다. 돈만 있으면 당장 이 절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하니 얼마나 마음이 상했을까 그녀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그녀가 나에게 했던 말이 있었다. “스님들은 어린애들 같아요. 먹는 것가지고 저러는 것 보면 뭐하려고 스님되었나 한심해보여요.”
그 말을 들으면서 그녀의 의문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렇다해서 스님의 입장이 이해가 안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고시공부를 치열하게 해보니 정진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알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부가 만화나 영화보는 것처럼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하고싶은것, 보고 싶은 본능을 참고 또 참고 해야 하는 인내의 연속이다보니, 공부기간이 어느정도 지나다보면 처음과 달리 신경이 계속 깍여서 나중에는 사소한 것에도 예민하게 된다. 그때는 몸도 마음도 지쳐있다는 것이다. 체력이 있으면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얼른 만회를 할 수 있지만 체력이 밀리게 되면 진도를 생각만큼 못빼게 되니까 속에서 신경질이 불쑥 불쑥 올라온다. 공부를 노련하게 잘하는 사람은 몸이 피곤하면 쉬었다가 하고, 머리에 열이나면 다른 일을 하면서 열을 식혔다 하지만, 의욕만 앞서면 무작정 앞으로만 나아갈려고 하니 몸이 더 고생하고, 빈곤의 악순환처럼 피로도가 계속 쌓이면서 공부는 마음 먹은만큼 성취되지 않는다. 그러니 온 신경이 먹는 것에 쏠리게 되어있다. 잘먹어야 힘이나고 기운을 차릴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먹는 것에 엄청 신경썼던 적이 있었다. 소고기 5인분을 먹어도 한 점도 먹지 않은 것처럼 허기진 때가 있었다. 국립의료원 인턴을 하던 형의 적은 월급으로 소고기를 얻어먹는 것도 미안하다 보니 스칸디비아 클럽이라는 우리나라 뷔페식당 1호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 을지로에 있던 국립의료원 내에 별도 건물로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씩 가서 먹었는데 오후 6시부터 오후 9시 30분까지 문이 닫힐 때까지 쉼없이 갖다 먹었다. 혼자 하염없이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았고 문을 닫아서 못 먹을 뿐이었다. 그때만 해도 창자의 깊이가 내 느낌에 200미터가 더 넘을 정도로 깊이감을 느꼈다. 지금이야 조금만 먹어도 배가 차서 두세번 가져다 먹으면 그만 먹게 되지만 그때는 먹어도 먹어도 속이 차지 않았다. 머리는 시원하고 창자의 깊이감을 느끼던 때였다. 그 뒤로 워커힐 피자헛에 지인이 데려가서 생전 처음 피자를 먹었는데 그 열량이 4일은 가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허기지던 게 사라졌다. 내가 볼때 마음이 안정되고 좋은 기운을 많이 축적하다 보니 어느 순간 적적성성(寂寂惺惺)이라는 말의 의미를 느길 수 있었다. 머리가 시원하다 못해 깨어있는 느낌이었다. 피곤한 줄 몰랐다. 앉아서 잔다는 장좌불와가 그래서 가능하겠구나 이해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슬만 먹고 산다’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잡념이 사라져 순풍을 만나듯 공부가 잘 되었다. 간혹 삐딱한 마음으로 ‘스님들도 고기 먹냐?’는 식으로 물어보는 이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말해주길 “잡념이 많으면 잘 먹어야 하고 잡념이 없으면 이슬만 먹어도 된다’라고 대답하였다. 먹는 것으로 기운을 차린다고 할 정도면 아직은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아있을 것 같다. 태안사에서 법문하던 청화 스님도 ‘사람은 먹는 것보다 기운을 먹고 사는 거다’라고 하였다. 사람은 날마다 밥은 먹을 줄 알아도 기운을 먹을 줄 모른다. 날마다 좋은 기운을 먹을 수 있도록 자신의 생활을 지혜롭게 이끌 필요가 있다. 그러면 먹는 것에 크게 시달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루하루 생존경쟁에서 살아가다 보면 말이 쉽지 실천하기 힘들다. 그래서 코일처럼 잘 감아놨던 수행의 힘도 흐물흐물해지기 마련이다. 막말로 말해서 ‘오늘 죽어도 도를 깨닫겠다는 정신으로 산다면 먹는 것이 무슨 필요있겠는가’라고 내가 말하기에는 주제가 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