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가는 과정] 인생의 전환점이 된 뉴질랜드에서의 체험 1
1993년 영해 유금사에서의 기도 체험에도 불구하고 그 해에도 또 시험에 떨어졌다. 진리가 냉정함을 느꼈지만 마음을 추스려 또 공부하기는 쉽지 않았다. 나야 좋아서 한다지만 이를 지켜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싶다. 집안에 수험생 하나만 있어도 고생이 말이 아니라는데 부모님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나이 30 넘도록 고시 하나에 매달리는 자식을 지켜보는
고통을 겪었을까 싶다. 어머니의 속은 새카맣게 다 타들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마음을 알기에 나도 실망하는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어머니는 오히려 그런 내 모습이 안타깝고 측은하게 보였는지 뉴질랜드로 이민가있는 형에게 다녀오면 어떻겠냐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가서 머리를 식히고 오라는 의미였다. 당시 같은 고시생을 보는 것도 지겹고 한국인을 보는 것도 지겨울 정도로 경쟁에 지쳐있던 차에 잘 됐다 싶어 흔쾌히 그해 11월에 뉴질랜드로 떠났다. 한국은 겨울이었지만 그곳은 여름이었다. 계절이 정 반대였다. 한국의 겨울은 회색이었지만 그곳은 하늘이 밝고 환했다. 아오테아로아 “하얗고 긴 구름의 나라” 라는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요즘같이 추위가 심하고 미세먼지가 많을 때마다 그 밝은 햇빛이 항상 그립다. 큰 가방 두 개를 들고 김포공항 검색대를 통과할 때가 생각난다. 가방을 열어 본 젊은 여자 세관공무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만 봤다. 가방 안에는 고시책만 잔뜩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25년이 지났다.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지 황망할 뿐이다. 사람이 나이 먹으면 그리운 곳을 찾는다더니 뉴질랜드는 나에게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당시 나는 20대 청춘을 고시 하나에 매달려 허망하게 보내버리고 오로지 합격 하나 만에 집착하여 마치 영화화면이 계속 정지된 듯 인생에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지루한 시간을 보내면서 마음에 깊은 골이 파이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힘들게 얻은만큼 지키려는 본능이 있다는 말이 다 이해가 된다.
당시 뉴질랜드에서의 경험은 내 인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그곳에서의 문화적 충격이 상당히 컸기 때문이다. 그곳에서의 첫 느낌은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다양하게 살고 있구나’ 였다. 그 당시 내 눈에는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무척이나 여유롭게 보였다. 그곳은 최소한 성적 좋은 사람만이 잘사는 그런 사회가 아닌 것 같았다. 성공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에 쫓기는 나에게는 자유의 느낌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선 열심히 공부했는데 이국땅에 와보니 초라한 존재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한 것은 우물 안 개구리들의 쓸데없는 소모전에 불과하였다는 후회가 절로 들었다. 더군다나 그동안의 삶은 여유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경쟁 속에서 신음하는 삶이었다. 사람으로 똑같이 태어나서 이렇게 서로 다르게 살아가는구나 하는 느낌이 드니 그동안의 세월이 한탄스럽고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동안 여유 있는 삶을 살아보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중략)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항시 생각하게 된 것이 여유 있는 삶, 여유 있게 살자는 것이었다. ‘잘되고 못되는 개념보다는 인생을 잘 사는 사람이 되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값진 실패 소중한 발견 중에서).
그런 계기들이 있었다.
빅토리아 대학교 도서관
뉴질랜드 웰링턴에 도착하자 마자 빅토리아 대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였다. 그때가 11월 중순이었다. 그곳 역시 학기말 시험 기간이라서 우리나라 도서관과 마찬가지로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이국적인 분위기라서 그런지 법서를 펴놓고 공부하는 게 지루하지 않았다. 캠퍼스와 타운이 구분되지 않아 여기 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보타닉 가든에 자주 산책하러 다녔다. 당시만 해도 웰링턴에 한국인들이 300여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국인들만 보는 게 더 좋았다. 영어는 못해도 길을 잘 찾아다녔다. 뉴질랜드인들은 참 친절하였다. 얼굴을 마주치면 항상 웃는 얼굴로 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답답한 마음이 서서히 풀어져가던 일주일쯤 되는 어느 날이었다. 도서관에 와 보니 좌석이 텅 비어있었다. 하루종일 있어도 수백 개의 좌석이 있는 한 층을 통털어 책 빌리기 위해 온 시민과 나까지 합해서 약 5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방학이라서 모두들 여행이나 아르바이트 등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러 떠났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방학이라 해도 학생들로 북적이는 우리나라 도서관과 대조가 되었다. 그들에게는 확실히 삶의 여유라는 것이 느껴졌다. 최소한 아등바등하면서 시험에 매달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공부도 지켜봐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기분이 나는 것인데 너무 썰렁하다보니 자연히 도서관을 나가지 않게 되었다.
의식하지 말란 말이야
뉴질랜드를 가자마자 형으로부터 골프를 배웠다. 아침 일찍 직장 옆에 있는 골프장을 같이 나가 형은 9홀만 치고 출근하고, 나는 18홀을 다 치고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생전 처음 골프채를 잡다보니 볼도 맞추지 못했다. 산악구보하듯이 산을 펄펄 날아 다녔던 입장에선 골프가 무슨 운동이 될까 의문을 품었지만 알고보니 골프는 멘탈운동이었다. 그래서 골프는 인생과 같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게 되었다. 형은 볼을 맞추지 못하고 헛스윙하기 일쑤인 나에게 한마디 했다. “볼을 의식하지 말란 말이야~” 형은 짜증내서 한 말이었지만 순간 나는 그동안 내 인생에서 풀지못했던 의문이 한순간에 풀어지는 시원한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나는 ‘열심히 했는데도 왜 이리 자꾸 떨어질까?’, ‘인생이 왜 이리 안 풀릴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점도 쳐보고 했지만 마음 한켠에는 항상 의문이 도사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주위 탓도 했지만 그게 원인이 아닌 것 같았다.
사람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면 그 원인을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찾으려 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고민만 더 많아지다가 결국은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도 한다. 시선을 자기 자신으로 돌려 원인을 찾으려 하는 게 쉽지 않다. 내 인생이 부속품이 아닌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이니 못나도 내 인생이다. 못난 현실을 100프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일까 하는 의문을 풀기 힘들던 차에 ‘의식하지 마라’는 말이 그동안의 내 고민을 한 번에 해결해 주었다.
‘아하! 내가 합격을 너무 의식했구나!’
의식을 하면 오히려 해가 된다. ‘올해 안되면 내 인생은 처지는데’라는 불안과 초조함이 합격을 집착하게 하고 결국 그 집착은 오히려 실패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희한하게도 그 뒤로부터 공부하는 것이 훨씬 편해졌고 실제 얼마 후 합격을 할 수 있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대로 생각 하나만 바꾸니 세상이 변했다.
20층을 올라가야지 하면 몸이 힘들지만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면 벌써 20층이다. 오늘 하루 하루가 재밌고 행복하면 인생도 행복할 것이다. 사람들은 네 잎 클로버를 찾아헤메다가 세 잎 클로버를 밟아 죽이는 어리석은 우를 범한다고들 한다. 지금은 돌아가신 국세청 재직시 덕을 많이 베푸시던 계장님이 해준 말씀이 지금은 유언으로 생각된다. 행운을 바라다가 행복을 놓친다는 의미라고 한다. 사람들은 항상 멀리서 찾으려는 본능이 있는 듯 하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그래서 있는가 싶다. 가정의 화목을 유지하는 게 행복이다.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는 게 행복이다. 자유가 있어 여기 저기 맘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게 행복이다. 자식들이 잘 커주는 게 행복이다. 형제간의 우애가 있는 게 행복이다. 오늘 하루 감사하게 느끼는 게 행복이다. 마음의 골을 파지 않는 게 행복이다. 저 하늘에 레이저를 쏘듯이 내 흔적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으니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참회할 수 있음이 행복이다. 평생을 남을 무시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본능에 시달리지 않는 게 행복이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이 왜 수천 년 동안 내려오는지 그 이유를 더 절실히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