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사법연수원 2년차 가을이었다. 사법연수원 수료시험을 본 직후에 문경 봉암사 선방에서 공부하고 있던 수좌스님의 초대로 그곳에서 일주일정도 머물렀다. 그곳은 우리나라 절중에서 일반인이 들어가지 못하는 유일한 곳이다. 대신 선방 수좌들의 요람이라고도 한다. 일반인이 못 들어가다보니 전설같은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지역주민들이 절 주변을 관광지화 하려고 했었는데 스님들이 반대하자 주먹들이 절로 쳐들어왔다고 한다. 스님들과 주먹들의 일대 접전이 벌어질 참이었는데 화엄사 출신 스님 한 사람이 땅바닥에 낫을 찍어놓고 두목에게 말하기를 “이 낫을 먼저 집는 사람이 상대방 목을 치기로 하자. 그리고 지는 쪽은 군소리 없이 물러가기로 하자”라고 했다고 한다.
처자식이 없고 ‘이 생 한번 없는 셈 치지’ 하는 중하고 처자식을 먹어 살려야 하고 이 생에서 잘살고 싶은 주먹하고 과연 누가 이길까? 그 말에 결국 주먹들이 겁을 먹고 물러간 뒤로는 일반인들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이 되었다는 말을 화엄사에서 기거하고 있었을 때 봉암사 출신 스님으로부터 들었다. 믿거나 말거나 전설 같은 이야기다.
그 스님은 화엄사 스님들이 그만큼 기운이 강하다는 것을 말하고자하였다. 실상 스님들을 만나보면 그 분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다.
화엄사는 지리산이라는 영산을 가지고 있다. 구례읍에 들어서면 벌써 공기냄새가 다르다. 또 화엄사계곡은 폭도 넓고 바위들도 큼직큼직할 뿐만 아니라 물소리도 엄청 크다. 화엄사에서 하룻밤이라도 자보면 실감을 할 수 있다. 계곡물 소리는 새벽이면 더 크게 들리는데 졸졸졸 실개천소리가 아니라 폭포가 쾅쾅 쏟아지는 소리다. 아무리 유약한 사람이라도 그런 소리를 몇 년 또는 십수년을 들으면서 살다보면 기질이 저절로 강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화엄사에 있는 건물이나 석탑들은 전부 크고 무게가 있어 보인다. 그것을 정확히 느끼려면 동이 틀 무렵 어둠이 막 사라질 즈음에 화엄사 경내에 앉아 있어보면 된다. 그 시간이 되면 어둠속에서 건물들의 윤곽이 살포시 드러난다. 그 순간 건물들이나 석탑들의 무게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낮에 보는 절은 눈으로만 슬쩍 보는 정도에 불과하다. 진짜 절을 구경하려면 하룻밤 자봐야 한다.
주위 사람들이 간혹 물어보는 게 있다. ‘절에서 어떻게 잘 수 있느냐고’. 뭐라 딱히 말할게 없다. 아는 스님이 있으면 좋다고 밖에. 조계종단의 절들은 조계종 승려들이면 아무나 가서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운수납자처럼 만행을 하다가 발길 닿는 절에서 유숙을 할 수 있다. 절이 어떤 개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인들 보다 오히려 스님들이 다른 절을 가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들이 아는 스님 절이 있으면 한번 보러갈 수 있지만 스님들은 구경삼아 이 절 저 절 갈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집안이 아니면 다른 집안 찿아 가는 게 쉽지 않듯이 절도 문중들이 있다 보니 같은 문중이 아니면 다른 문중 절에 가서 객으로 머무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나이 먹은 노스님들은 더 그렇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큰 절이든 작은 절이든 노스님들이 별로 없다. 조계종단의 스님들이 만 명이라면 결국 그 만 명이 언젠가는 나이를 먹을 것이이다. 나이 들면 서럽다는 게 젊은 사람들로부터 대우를 못 받기 때문이다. 기력도 없어 하는 일이 없으면 더 그렇다. 세상이치가 승속이 구별된다 해서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젊을 때야 도 닦다 길에서 죽어도 좋다고 열심히 하지만 그게 티가 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보니 나이가 들면 덜컥 겁이 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앞날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 것은 사람이라면 떨쳐버릴 수 없는 본능이다. 그 본능을 거슬러 가는 게 수행인데 그게 쉬운 일이겠는가? 결국 내 집을 마련하는 게 좋은 거다.
요즘은 가는 절마다 불사를 안 하는 곳이 없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새 건물들이 많이 들어선다. 고즈넉하고 아담한 절을 찾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순천 선암사가 고풍스러운 이유는 단청이 벗겨져도 돈이 없어 단청을 새로 입히지 못했다고 한다. 그게 오히려 관광자원이 된 것이다. 고풍스러운 절이 그립다. 오솔길을 따라 한참동안 걸어야 비로소 닿는 절이 그립다. 요즘에야 스님들의 위상이 성직자의 대우를 받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러지 못했다. 성직자의 특성은 훈육적이라고 한다. 항상 상대방을 학생으로 생각하고 가르치려고 한다는 신문칼럼을 읽은 기억이 난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우리나라 절은 아픈 역사가 있다. 조선시대 승려는 칠반천인중 가장 끄트머리에 해당되는 천민이었다. 이판사판이라는 말의 의미 속에 그 역사가 담겨있다.
이판은 선승을 말하고 사판은 소임을 보면서 절살림을 하는 스님을 말한다. 따라서 이판사판이라는 말은 스님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그 의미가 그렇게 쓰여지는 게 아니라 막다른 곳까지 가서 더 이상 물러날 데도 없다는 의미로 변질되어 사용되었다. 천민중의 천민이 되었는데 더 이상 못될 게 뭐가 있느냐. 그래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하는 식이다. 승려를 비꼬는 ‘땡초’라는 단어도 원래는 ‘당취’라는 비밀결사에서 변질된 말이라고 한다.
봉암사 계곡을 따라 산책을 해보면 계곡물이 그렇게 맑을 수 없다. 그리고 편편한 바위가 많은데 어떤 바위는 그 위에서 족구를 해도 될 정도로 넓어보였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암자가 있다. 계곡을 따라가는 오솔길 맨끝에 있는 조그만 암자 하나와 봉암사에서 희양산으로 올라가는 입구 근처에 놓여있는 커다란 바위의 틈새를 메꿔서 사람 한사람 기거할 정도로 만들어놓은 토굴이다. 없는 신심도 절로 날만 하였다. 이 곳 선방은 여러 부류가 있다. 하루 8시간을 수행하든지 12시간을 하든지 철야정진을 하든지 선택하게끔 되어있다. 일주일 철야정진을 하는 게 도력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국세청 재직 시 경복궁 산책을 가끔 할 때 청와대가 뒤에 있는 북악산을 볼 때 마다 생각나는 게 봉암사 희양산이었다. 둘 다 삼각형모양인데 북악산은 희양산에 비해 훨씬 규모가 적다. 그 산들을 보면서 맨 먼저 느끼는 게 ‘아 좋다!’ 이런 게 아니라 사람으로 치면 사고뭉치같이 말 엄청 안 들을 것 같은 느낌이 정도로 애물단지 같아 보인다. 보통 그런 산 밑에는 사람이 사는 게 아니라고 한다. 사람이 살아도 극과 극을 달린다고 한다. 사고뭉치 같은 사람들이 살든지 수승한 수행승이 살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한다. 봉암사도 예전에는 술 먹고 주먹질하는 중들이 모여 살았는데 지금은 수행을 여법하게 하는 수좌들이 모여 정진하는 곳으로 변하였다는 말을 아는 스님으로부터 전해들은 적이 있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북악산 밑에 있는 청와대는 과연 어떨까? 사람이 살 곳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