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전문변호사로 사는 이야기] 피가 맑아야
미세먼지로 고역이다. 사람은 움직여야 산다는데
움직이지 못하니 더 고역이다. 폐가 나빠지고 암에 걸린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돌아다니기 겁난다. 창살없는 감옥생활을 다들 경험하고 있다. 몸이 나쁜 것도 있지만 우선 정신건강이 문제다. 움직이지 못하니 우울해진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기운을 먹고 살아야 한다. 생기가 돌아야 피순환이 원활해진다. 피가 심장에서 머리까지 잘 공급돼야 머리도 시원해진다. 머리가 시원해지면 뿌듯한 느낌이 든다. 그게 부자 느낌이다. 머리가 뜨거우면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했다고 보면 된다. 피가 맑지 못하다는 증거다. 피가 맑으면 혈관도 좋다. 혈관이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 있다. 그 기분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30대 초반에 경험했는데 그때 ‘피가 맑아야 겠구나’라는 소리를 내면에서 들을 정도로 좋았다. 혈관이 좁아지고 피가 찐덕찐덕 해지는 순간부터 지병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한번 심혈관 계통에 이상이 오면 오래 못 사는 것 같다. 주변의 가까운 분들이 70대에 돌아가셨다. 부품수명이 그때쯤이면 다하는 것 같다. 수명도 다하기 전에 수명을 다하는 경우는 뇌출혈이다. 49세 되던 해 뇌출혈이 왔다. 머리가 아프고 구토가 있자 스스로 삼성병원을 찾아갔다. CT를 두번 찍더니 즉시 중환자실 입원이었다. 피뽑는 사람이 말하기를 “피는 20대 네요”라고 말했다. “보면 알아요?”
“보면 알죠”
피검사를 해봐야 점도 등을 알 수 있지만 피를 하도 많이 뽑아봐서 육안으로도 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랬는지 다음날 아침일찍 수술을 했는데 멀쩡히 나왔다. 수술 전에는 사타구니 혈관으로 조형제를 넣어서 피가 터진 혈관을 찾아내어 스텐트 시술을 하겠다고 하면서 만일 그걸로 안되면 머리두개골을 열어 수술할 거라고 하였다. 불과 12시간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이라 갑자기 건강한 사람이 중환자가 돼버렸다. 수술실로 들어가면서 아내의 손을 잡고 “나는 내 식대로 살아봐서 원은 없네 “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내가 보살이었다. 아무런 동요를 하지 않았다. 평상시와 같이 조용하고 편한 표정으로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수술실에 들어가 부분마취를 하고 수술을 하는데 수술하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혈관을 못찾는다는 식으로 말했던 것 같았다. 피가 뇌에 번졌던 것이 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주 드물게 혈관이 피를 다시 먹는 경우가 있다고 하였다. 일시의 충격이나 스트레스로 혈관이 터지더라도 피가 맑으면 새나온 피가 다시 혈관으로 들어간다는 거였다. 내 경우가 그랬다. 찌거기 하나 없이 말짱하였다. 3D로 뇌혈관을 실핏줄까지 볼 수 있다. 의사는 나중에도 그 이유를 말하지는 못했다. 대신 뇌출혈을 고치러 갔다가 조형제 부작용으로 엄청 고생만 하였다. 병원이 오히려 진짜 환자를 만든 기분이 들었다. 무슨 검사를 그리도 많이 하는지 그런 식으로 할 거면 나도 의사하겠다는 말이 속에서 우러 나왔다. 수술실에서 나와 중환자실로 옮겨갔다. 나 빼고 9명이 침상에 의식도 없이 누워있었다. 머리에 망사를 쓰고 있는 이들은 두개골을 연 사람들이라고 했다. 가만히 보니 스탠드 시술과 머리 연 사람 비율이 절반 절반이었다. 유일하게 의식이 있고 걸어다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소변기를 채워놔서 배설의 자유를 제약한 것 외에는 정상인과 다름없었다. 내가봐도 나이롱 환자였다. 소변 대변할 때 왜 ‘펀할 편(便)’자를 쓰는 지 뻐저리게 느꼈다. 소변을 시원하게 보지 못하는 게 진짜 고역이었다. 맨 처음 화장실을 다녀오고 소변기를 찼어야 했는데 잔뇨가 있는 느낌에서 그걸 차니 항상 찝찝했다. 수술 다음날이 되어서야 그걸 제거했는데 그때의 시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중환자임에도 밥을 두 그릇씩 먹었다. 한그릇으로는 너무 배고파서 한 그릇 더 달라고 하니 의사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결국 의사 허락을 받아 매끼마다 두 그릇을 먹었다. 근데 너무 미안했다. 유일하게 앉아서 밥먹는 이는 나밖에 없었다. 다른 환자들은 코로 미음을 넣어주거나 환자가족이 떠먹여 주었다. 오른쪽 끝 침상의 환자는 할머니였는데 딸 한명만 있는지 유일한 면회자였다. 근데 식사 시간 때마다 전쟁이었다. “엄마! 제발 밥 먹어. 내가 죽는 꼴 보려고 그래!” 흐느끼는 소리가 항시 들렸다. 그 할머니는 곡기를 끊고 가시려고 한 것 같았다.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했던 것 같았다. 반면에 건너편 침상의 할머니는 코로 음식물을 집어넣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진짜 중환자였다. 근데 면회시간만 되면 딸들과 사위까지 우르르 들어왔다. ‘어머니! 저 알아보시겠어요?’
다들 한마디씩 한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웃음이 나왔다. 할머니가 재산이 많은 듯 했다. 죽는 것은 똑같은데 재산이 있고 없고 따라서 한쪽은 흐느끼고 다른 한쪽은 할머니에게 눈도장 찍으려고 성화다. 그런 모습이나 다들누워 오늘 내일 하는 모습을 보기도 그렇고, 또 밥 먹을 때마다 다른 환자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제발 일반병실로 옮겨달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대답은 뇌병동 환자들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중환자실에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약을 먹으면 하루 18시간은 자는 것 같았다. 수면제가 약이었다. 뇌가 쉬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긴 잠을 안 자면 또 머리를 굴릴 것이 뻔하다. 머리 쓰는 게 생명에너지를 까먹는 비결이다. 뇌출혈이 온 이유도 스트레스였다. 수천억대의 세금사건을 6개월 동안 어느 교육관련 회사에 상주하면서 진짜 내 일처럼 올인하였다. 재무담당이사는 항상 내 앞에 앉아서 나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같이 있었다. 근데 그게 그들의 전략이었다. 내가 서면을 다 쓰기만을 바라고 그 시점을 노리고 있었다. 5개가 넘는 사건의 서면을 다 쓰자 본색이 나왔다. 너가 한 게 뭐가 있냐는 식이었다. 사건 내막을 여기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 교육회사 회장은 어리숙한 나에게 세상을 가르쳐주고자 애를 쓰는 신장같았다. 사람 속을 적나라하게 보여줬고 부자의 생리를 알 게 해줬다. 돈 앞에 손을 벌벌 떨던 그 날숨이 지금도 느껴진다. 그 옆에 붙어서 그의 돈에 빌붙어 사는 이들의 행태와 공직자들의 모습들을 생생히 겪었다. 작년에 그를 음식점에서 봤을 때 그는 애써 나를 못본 척 했지만 내가 그를 안아줬다. 그를 의식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절집체험을 해서 그런지 그가 죽도록 미웠지만 내가 살려고 그랬는지 미워하면 죽는다는 생각을 가졌다. 살기위해 용서하는 거였다. 그런 맹하고 어눌한 모습때문에 세상사람들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나에게 항상 충고를 하거나 가르치려 한다. ‘잘되기 보다는 잘살자’라는 맘을 먹었을 때부터 맹한 사람이 돼버렸다. 이래도 살고 저래도 산다. 남들에게 좀 어눌하게 사는 것도 해보지 않으면 또 언젠가는 다시 태어나서 경험해야 한다. 한 생을 살면서 한 생만 사는 이가 있고 여러 생을 사는 이가 있다. 그게 인생관이다. 이 공간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세계가 다 같이 공존한다고 한다. 사람이어도 사람이 아닌 이들이 많다. 육도윤회는 죽어서만 하는 게 아니라 살아서도 하는 것 같다. 여러 세계의 사람들을 경험하면서 나 역시 윤회를 수시로 하고 있다.
3일이 지나자 준중환자실로 옮겼고 다시 일반병실로 옮겼다. 어느 날은 진짜 내가 뇌에 피가 번진 게 맞는지 CT 사진을 확인해 보자고 했다. 사진을 보니 뇌에 피가 번져있었다. 일반병실은 2인실이었다. 같은 방에 있던 분은 삼성병원을 만든 분이었다. 자신이 의사들을 면접봐서 직접 뽑고 병원을 개원시키는 실무를 책임졌다고 했다. 삼성그룹 임원이었다. 첫 인상 부터 임원 포스였다. 그 분은 만 60세였는데 뇌졸증이었다. 증상은 어지럽다고 하였다. 그분도 스스로 병원을 찾아서 입원한 경우였다. 담배를 하루에 세 갑씩 피웠는데 몸이 안좋아서 담배를 끊었다가 공황장애가 왔다고 하였다. “공황장애가 뭡니까?”라고 묻자 가슴이 찢기는 듯 한 고통이 온다고 하였다. 결국 의사는 정신병 드는 것보다 담배 피는 게 낫다고 해서 다시 피었는데 결국 뇌졸증으로 담배도 못 피게 되었다고 했다. 평생 약을 먹어야 하고 병원에 매주 와서 피 점도가 끈적한지 여부를 체크해야 하는 불편을 죽을 때까지 겪어야 한다고 했다. 어느 날 새벽에 딱딱 거리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그분이 묵주를 돌리고 있었다. 종교와 전혀 무관할 분도 결국 종교에 의존하게 되는구나 싶었다. 그렇게 일주일간 병원에서 평생 처음으로 색다른 인생경험을 하였다. 건강이 뭐니뭐니해도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