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세청에서의 5년] 6 법의 정신
다음 내용은 2003년 정기인사이동 이후 새로 법무과에 온 직원분들에게 법무과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쓴 글이다.
이번 인사이동을 하면서 저희 법무과를 오려고 희망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왜 법무과를 선호할까?’생각을 해봤습니다. 우선 법무과 분위기가 자유롭다는 점, 그리고 세무사공부를 하기에 좋다는 점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죠.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법의 정신을 잘 알기 때문에 법무과에 오고 싶어 했을 것이라고….
법의 정신!
법의 정신이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옛날 옛날에 아주 옛날일수록 군주는 절대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오죽했으면 루이14세가 “짐이 곧 국가이다”라고 말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을 때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오만방자한 권력자라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군대생활을 할 때 보면, 고참이 자기 기분 나쁘다고 함부로 때리고 기합을 주는 것만큼 기분 나쁜 게 없었습니다. 사람의 심리가 다르지 않으니 예전에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절대군주로부터 일반 국민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했겠습니까?
인류역사는 이러한 오만한 절대자로부터 권력을 빼앗는 과정이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짐이 곧 국가가 아니라 짐은 일개 개인이고 국가는 국가인 것입니다. 그런 오만방자한 절대자가 더 이상 그런 말을 하지 못하도록 정신차리게 따금한 교훈을 주는 게 그동안의 역사였습니다. 그 결과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생기게 되었고 그게 오늘날에도 지켜지고 있는 영국의 입헌군주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게 저절로 얻어진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따랐습니다. 시민혁명에 대해서 여러분들도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결국 18세기 이후부터 근대시민사회가 형성되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 각국에는 아직도 독재정권이 있는 실정이며, 그에 저항하다가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따르고 있습니다.
절대군주가 존재하는 시대에는 국가와 국민의 관계가 다음과 같았습니다. 국가는 개인에게 일방적으로 의무를 부담하거나 희생을 강요할 뿐이었고, 개인은 어느 누구로부터도 구제를 받을 수 있는 기관이나 절차가 없어 억울함을 하소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민혁명 등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변하였습니다. 절대군주가 독점하고 있는 국가권력을 3권으로 분립해버리고 절대군주는 행정권력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도 어떻게 하면 절대자의 권력을 억제할까? 이런 화두로 계속 제도를 정비하는 게 역사의 발전이었습니다. 법치행정, 조세법률주의 등이 그 예입니다.
그리고 개인은 국가를 상대로 억울함을 주장하고 자신의 권익구제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행정부를 불신하다보니 별도의 기관을 만들어 그곳을 통해 개인의 억울함을 해소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3의 기관인 사법부로부터 받았습니다. 권력내부로부터의 구제는 꿈도 못 꾸었습니다.
개인의 억울함!
시민혁명을 통해 이러한 제도가 형성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억울한 사연들이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국민의 권익을 구제받을 수 있는 기관이 더 많아지게 해야 했고, 국가권력의 행사에 있어서는 반드시 법적근거가 있어야 하는 것으로 해서 법치행정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법치행정이 실상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행정을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싫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정부의 행정처분에 대한 위법성 인정을 더욱 더 쉽게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법원에 가서 권익구제를 받으려면 행정처분이 위법해야 합니다. 위법하면 법원에 가서 내 권리를 주장할 수 있지만, 부당하면 구제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내 권익을 침해당한 입장에선 어떻게 해서든지 행정행위에 대한 위법성 만들기를 더 쉽게 해야 권익보호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위법성 인정을 더 쉽게 만들 수 있을까?
첫째, 법령에 위반하면 위법, 법령에 근거 없으면 위법입니다. 후자는 너무 당연하니까 설명을 생략하고 전자만 설명하겠습니다.
법률에 위반하면 위법, 법규명령에 위반해도 위법
여기까지는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행정규칙에 위반해도 위법일까요? 바로 이게 문제입니다. 사회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고 속도가 빠르다 보니, 오히려 그 부피를 줄이려고 했던 행정부의 기능이 더욱더 커질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의존하는 일이 많아지다 보니 이제는 행정부가 할 일이 너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행정의존시대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무슨 일만 생기면 사람들이 하는 말이 “왜 정부가 나서지 않느냐?”“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는 식입니다. 그래서 행정부가 해야 할 일이 많다보니 법령만 더 늘어나고, 그렇다 해서 법령에다 구체적이고 기술적인 것까지 다 기술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통칙, 예규 등의 행정규칙에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것을 많이 위임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행정은 행정규칙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법률에 의한 행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행정규칙에 의한 행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행정규칙에 위반한 것은 위법이 아니라 부당한 것밖에 되지 않아 사법부로부터의 구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면 안 되겠다’는 심정으로 행정규칙에 위반하는 경우도 위법성을 인정할 수 있게 하자고 궁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공권력을 구속하고 국민권익을 보호하겠다는 취지입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행정규칙의 법규화입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행정규칙이 과잉금지의 원칙이나 신뢰보호의 원칙, 평등의 원칙, 신의성실원칙 등에 위반하면 위법성이 인정됩니다. 또한 행정규칙이라도 재량준칙에 위반하는 행위는 위법한 것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후자는 아직 견해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위법성을 만들 수 있는 무기가 이것밖에 없을까요?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궁리를 해서 무기를 더 발견해내야 합니다. 그래서 최근에 나온 신무기가 행정절차라는 무기입니다. 행정처분을 할 때는 항상 정해진 절차에 따라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 명의 도둑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사람의 억울한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게 그 목적입니다. 자의적이고 행정편의적인 공권력의 속성을 어떻게 해서든지 억제해보겠다는 눈물겨운 노력의 산물입니다.
최근에 서울지검에서 피의자 한 명이 주검으로 실려 나가고 다른 한사람은 고문으로 부상을 당했습니다. 사건이 발각된 그 다음날 담당검사는 구속이 되고 그 외 검찰수사관들도 구속을 당하였습니다. 전 그 뉴스를 보면서 측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욕이 너무 강하고 앞서다보니 주객이 전도되는 결과를 가지고 온 것이었습니다. 남의 일같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검사나 수사관들의 심정이 내 가슴에 와 닿는 것 같았습니다. 상대방이 뻔히 거짓말하고 능청스럽게 사실을 숨기고, 태도가 삐딱하게 불량한 사람들을 상대로 하다보면 속에서 불길이 치솟아 그 열기가 어디로 나가지 못하고 눈빛으로 지글지글 타오르게 됩니다. 그러니 한번 성질나면 주위에 보는 사람도 없겠다, 상대방은 포승줄로 묶이어 저항도 못하겠다, 만만하게 보이므로 한번 때리고 두 번 때리기 시작하면 계속 열기가 식을 때까지 상대방을 가혹하게 다루는 겁니다.
그런데 공권력을 행사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마저도 주먹과 성질이 앞선다면 깡패와 똑같지 않겠습니까? 후배검사로부터 이야기를 하나 들은 게 있습니다. 실체적 진실을 밝히고자 도청을 하자고 수사검사들이 부장검사에게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부장검사가 한참 생각한 끝에 나오는 말이 “우리는 절차를 지켜야 해” 였다고 합니다.
그분의 입장에선 공권력에는 도덕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킬 것 다 지키고 언제 수사하느냐고 불만을 터트리는 사람들은 그 부장검사의 깊은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의욕이 앞서 공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다보니, 아직도 권익을 보호하고 인권을 수호해야 하는 국가권력기관 안에서 물고문 받아 사람이 죽어나가고, 각방에서 고함소리와 쌍소리가 나오고, 피의자는 무죄로 추정됨에도 불구하고 죄인 다루듯이 하니 피의자는 수사관의 비위를 맞추기에 진땀을 뺍니다. 밀실에서 하는 일들은 입증하기도 어려워 아직도 이런 일들이 남몰래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국가권력을 어떻게 해서든지 억제해보려고 하는 것이 인류역사발전의 방향이었고, 그 이면에는 하나의 철학이 있습니다.
자타불이입니다.
남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남은 남이고 나는 나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성현의 말씀이 틀린 경우가 있겠습니까? 단지 우리가 못 느낄 뿐이죠.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시차를 두고 언젠가 다 나도 겪을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이미 겪었던지, 현재 겪고 있든지 ….
따라서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고통이 절대 나와 무관하지가 않습니다. 언제 어느 때이든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들입니다. 대구지하철 참사로 비명횡사한 사람들이 아침에 출근할 때만 해도 죽음을 예견했겠습니까?
법을 한문으로 표현하면 法입니다. 풀이하면 물이 흘러간다는 뜻입니다. 어떤 일이 잘될 때 ‘물 흐르듯이 흘러간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만큼 물 흐르는 모습은 자연스럽다는 것이고 이는 어느 누가 봐도 당연하다해서 順理라고도 표현합니다. 세상진리가 바로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진리를 책으로 엮으면 경전이고, 이를 제도에 투영시키면 法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법의 정신은 결국 자타불이 즉 부처님이나 하느님이 항상 말씀하시는 진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깨인 사람 눈에는 너와 내가 분명 둘이 아니고, 꼬집어서 아파하는 내 몸도 분명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법을 다룬다는 의미는 결코 법전이나 뒤지고 딱딱하고 논리싸움이나 하는 구태의연한 고정관념 속에서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진리를 실생활에서 실천하고 제도로 발현시키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 청사 엘리베이터를 타면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不聞不若聞之 聞之不若見之 見之不若知之 知之不若行之 (荀子)
가르침을 듣지 않는 것보다는 듣는 것이 좋고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이 좋고,
보는 것보다는 마음으로 아는 것이 좋다.
그러나 아는 것보다는 실행하는 것이 더 좋다.
결국 교양의 최종 목적은 이것을 실천하는데 있다.
우리 법무과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우리 법무과는 행정조직내부에서도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권익보호기관을 만들어 낸 역사의 산물입니다. 그만큼 역사적 필연성과 요구하는 목적을 실천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걸 저희 법무과가 해야 합니다. 같은 편이라 해서 오히려 처분청을 옹호해서는 안 됩니다. 권익보호기능뿐만 아니라 견제기능도 충분히 발휘해야 합니다.
이번에 새로이 저희 법무과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모두 이런 법의 정신을 발현하고자 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또 그래야 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