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착선사와 문수보살에 대한 경봉선사 법문이 마음에 와 닿는다.
진리가 평등하기 때문에 예와 이제가 한결같다. 이 법이 평등하므로 높고 낮음과 깊고 짧음과 옳고 그름과 밝고 어두움과 선과 악과 생과 사가 없는 것이다. 이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 것이다. -경봉선사
당나라 시대의 무착은 문수보살을 친견하는 게 평생의 소원이었다. 성지인 오대산을 헤매다가 소를 몰고 오는 노인이 문수보살임에도 이를 알지 못하여 노인의 물음에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아무 대답도 못하였다.
“남방에도 이런 물건이 있느냐?”
“자네 밥 먹었는가?”
“앞도 三三이요 뒤도 三三이니라.”
“자네 계행을 지키는가?”
“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지켜서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염착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룻밤 자고 가기를 청하자 노인은 염착(染着)이 있으면 잘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마음에 번민과 집착이 있다는 거다. 가져도 가짐이 없고 행해도 행함이 없고 닦아도 닦음이 없는 경지에 들어가야 하는데 아직까지 꼭 거머쥐고 있으니까 집착이라고 하였다.
무착은 문밖으로 배웅해주는 동자에게 법문을 청하였다.
얼굴에 화를 안 내면 공양거리요
입으로 화를 내지 않으면 묘한 향을 토함이요
마음 가운데 성냄이 없으면 이것이 참보배요
물듦과 때가 없으면 곧 항상 참됨이로다
面上無嗔供養具
口裡無嗔吐妙香
心內無嗔是珍寶
無垢無染卽眞常
무착은 그 후 공부를 착실히 하여 동지 팥죽을 솥에 쑤고 있었는데, 문수보살이 죽속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주걱으로 치면서 말했다.
“문수도 자기의 문수요 무착도 내 무착이다.”
공부가 익으면서 무착은 깨달았다.
‘참된 문수는 나의 내면에서 나타나는 크나큰 지혜일 뿐 밖으로부터 구해야 될 대상이 아니다.’
오대산에는 문수가 없다. 바로 지금 이 마음에 살아있는 문수가 있다.
곰다리를 붙들고 있어야만 하는 처지의 사람들이 많다.
가정을 이룬 후에는 마치 곰 다리 거머쥔 것과 같다.
꼼짝 못하고 오만 걱정, 사람 아니면 물질, 물질 아니면 사람, 이 두 가지에 밤낮없이 걱정이다.
경봉선사는 말한다. 어쨓든 이 두 가지에 초월해서 사바세계를 무대로 삼고 멋들어지게 연극을 잘하고, 늘 쾌활하고 명랑하고 낙관적인 기분으로 살라고 이른다.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모든 일에, 당기면 늘어지고 놓으면 오그라지는 신축성을 가지고 마음을 쓰고, 폭을 넓게 하고, 남을 관대하게 포용하고 물질과 사람에 초월한 정신을 가지고 멋들어지게 살라고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