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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전문변호사 고성춘 법률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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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24일 By 고성춘 조세전문변호사

찾지않아도 있는 것을(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그동안 나는 절에서 영가천도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아왔다. 그때마다 의문이 있었다.

‘과연 이렇게 천도재(遷度齋) 한 번 했다 해서 죽은 영가들이 좋은 데로 가는 것일까?’ 

속초 홍련암에 갔었을 때였다.

일주일이 다 되어 떠나기 전날 기도를 회향하는 의미에서 같이 갔던 일행 중 한분이 남편에 대한 천도재를 지냈다. 

의식의 마지막 순서였다. 
뭔가를 태우고 있었다. 연기를 타고 재가 날라 다녔다. 
나는 바다 절벽 위에 세워진 법당에서 그 장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분은 타는 재를 쳐다보면서 설움에 복받쳐 우는 울음인지 회한의 눈물인지 울고 있었다. 
스님이 치는 목탁소리는 서럽게 들렸다. 저 멀리 수평선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너무 잔잔하였다. 
다만 절벽을 치는 파도소리만 들려왔다. 파도는 철썩 바위를 치면서 수많은 하얀 물거품을 내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우리 인생이 마치 그 거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마 저 파도는 수 만 년 전에도 똑같이 찰싹 찰싹 바위를 치면서 하얀 물거품을 내뿜고 있었을 것이다. 
그 분은 계속 서럽게 울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모든 글의 주제는 딱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경쟁’ 다른 하나는 ‘무상’이다.
젊을 때는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내가 잘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관심사이지만, 
나이가 들거나 죽음을 앞두거나 병에 걸려 건강을 잃은 입장에선 무상함을 느낄 것이다. 
판소리 노래가사의 경우만 보더라도 거의 태반이 무상함을 주제로 하고 있다. 
불교방송에서 경전공부를 진행하는 스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사람들은 생로병사를 절대 피할 수 없음에도 죽음이 저 멀리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로 목전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명확해집니다.”
우리 애들도 언젠가는 종교를 가지게 될 것이다. 
언젠가 그들도 자라 무상의 관문에서 아버지가 했던 고민을 설령 똑같이 반복하더라도

나와 같은 방황과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가상(假想)의 스님을 빗대어 나의 생각을 말하고자 한다.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49재를 왜 합니까”

“…”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물어보았다.
“스님! 사후세계가 있습니까?”
“…”
또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님은 묵묵부답이었다. 아무 반응이 없자 나는 은근히 기분이 나빠졌다. 그 순간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비로소 스님이 입을 떼었다.
“사는 것이 죽는 것이요.”
“예?”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스님은 한참 후에 다시 말하였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훨씬 큽니다.”
마치 동문서답(東問西答)하는 것 같았다. 
“스님! 전 49재를 왜 하는지 그걸 알고 싶은데요.”
스님은 껄껄 웃었다.
“제가 말하는 것을 거사님은 어떻게 듣나요.”
“…”
갑작스런 질문에 눈만 똥그래진 채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귀가 듣습니까?”
“아니죠. 귀가 듣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죠”
“그러면 저를 보는 것이 눈입니까?”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감이 전혀 안 잡혔다.
“좀 쉽게 말해주시면 안 될까요.”
“귀가 듣는 것이 아니고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면 내 말과 나를 보는 그 주체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게 바로 세세생생(世世生生) 유전하고 있는‘진짜 나’입니다.”
‘진짜 나?’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스님은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었다.
“저 산을 둘러싸고 있는 구름 뒤에 뭐가 있습니까?”
“산이 있죠?”
“ 그럼,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해서 산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맞아요. 산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못 볼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보지 못한다 해서 사후세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천도한다고 하는데 죽은 사람들에게 뭐를 천도한다는 것입니까?”
스님은 대답하였다. 
“죽은 영가들에게 모든 것은 덧없으니 집착하지 말고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라고 하는 거죠. 그리고 새로운 변화를 맞아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럼, 그렇게 말하면 영가들이 알아듣습니까?”
“사람 사는 것이 모두 이 몸뚱이 유지하려 하다보니까‘내가 있고 네가 있는 거다’라고 분별하면서 서로 대립과 경쟁의식으로 똘똘 뭉쳐있는 거죠. 이 몸뚱이 때문에 착각을 한다는 거지요. 그런데 그들은 집착해야 할 몸뚱이가 없다보니 마음으로 알아듣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49일 일까요?”
“죽은 후 일주일에 한 번씩 죽고 태어난다고 그래요. 
그 기간 안에 결정이 안 되어지면 다음 일주일에 결정되고, 또 안 되면 다음다음 해서 그 마지막 7주째까지는 다 결정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49일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재(祭)를 지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결정을 누가 재판해주나요.”
“사람이 죽은 후 명부(冥府)의 시왕(十王)에게 1주일마다 심판을 받는다고 하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죠. 
우리는 삶의 연속선상에서 단지 일순간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불과합니다. 
육신을 버리고 세상을 떠났다고 하지만 이게 진짜 나’가 아니기 때문에 내 의식이 얼마나 성숙되어있느냐에 결정된다고 봐야죠.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을 거슬릴 수 있는 사람들은 한명도 없다고 보면 됩니다.”
스님은 잠시 먼 산을 쳐다보았다. 마치 세상을 초탈한 사람처럼 보였다.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렀어. 그런데 하룻밤 꿈이야. 지나온 내 모습을 보면 부끄럽고.”
“무슨 말씀을. 스님 같은 분이 그러면 우리들은 다 땅에다 얼굴박아야 되겠네요.”
“요즘은 모든 일이 더욱 더 부질없어 보여요. 이제 나도 죽을 준비를 해야 되겠어요.”
“무슨 말씀을. 아직도 정정하신데요. 오래 사셔야죠.”
“앞으로 살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죽음이 내 몸 한구석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알지요. 마음속의 집착과 욕망이 꺼지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아! 그래서 부도 곁에 와서 오랫동안 앉아 있다가 가시는군요.”
스님은 죽음을 항상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제야 비로소 스님이 왜 ‘사는 것이 죽는 것이요’라고 말했는지 조금이나마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죽는다는 것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지요.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서는 모든 인연을 다 제자리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이 육신도 말입니다. 옛 선사들은 육신을 헌옷처럼 버리면서 즐거워했는데 말입니다.”
“스님, 그건 좀 이해가 안 되네요. 어떤 사람치고 죽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어떻게든 살고 싶은 게 사람인데. 전 죽음이 두렵습니다.”
스님은 나의 질문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였다.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렇다 해서 죽음도 삶의 종말이 아닙니다. 
나무가 잎을 다 떨어트리고 겨울을 준비해야 봄이 오듯이 새로운 변화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도 사람은 삶에 대한 애착과 집착 때문에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니 죽을 때는 아쉬운 것도 많을 뿐만 아니라 죽음이 두렵고 슬픈 일입니다.”
나는 스님에게 말하였다.
“새로운 변화도 좋지만 여하튼 죽는 것은 좋은 일은 아닙니다. 슬픈 일입니다. 그동안 이룩해놓은 것을 한순간에 다 잃는다는 것은 너무 허무한 것입니다.”
스님같이 세상살이 다 하고 나이가 들어 죽음을 생각하는 입장에선 그렇다 치더라도 나 같이 젊은 사람 입장에선 죽음 자체를 생각하기 싫었다. 내 삶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스님은 말하였다.
“저기 저 바다를 보세요. 파도가 찰싹 칠 때마다 하얀 물거품이 일어나죠. 저 거품이 일어나는 것이 태어나는 것이고 저 거품이 꺼지는 것이 죽음입니다. 
바람이 부는 것은 태어나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은 죽음입니다. 저 바람이 어디서 붑니까. 저 파도가 어디서 치는 것입니까?”
“….”
“원효스님은 인간의 본원을 마음이라고 했어요. 이 마음은 깊고 고요하며 깨끗하고 평화롭다고 하였습니다. 
텅 비고 고요한 마음의 근원은 형상이 없어 볼 수 없으며, 한없이 크지만 감싸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만물이 다 이로부터 나온다고 설명하였지요.”
그런데 나는 의문이 들었다.
“이 마음도 죽으면 부질없는 것 아닙니까?”
스님은 대답하였다. 
“바로 이 근원에는 나고 죽음이 없지요. 고금(古今)도 없어요. 육신도 존재하지 않지요. 오고 감이 없어요. 
이게 우리의 고향입니다. 그러니 죽는다는 것은 육신을 버리고 고향으로 가는 것이랍니다. 잠시 인연 따라 육신의 몸으로 태어났을 뿐입니다.”
“무슨 말인지 도대체 이해가 안 되네요. 죽으면 끝이 아닙니까?”
“삶과 죽음은 내 생각으로 있을 뿐 실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지금은 내 본성이 잡다한 생각이나 감정들에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영감을 받아 구름이 걷힐 날이 있으면 청산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럼 저희들이 구름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겁니까?”
“원효스님도 막속급호(莫速急乎)라고 하였습니다.‘급하구나! 급하구나!’하였습니다. 
이제는 그동안 세세생생을 통해 본능적으로 해왔던 우리의 본성을 더럽히는 어리석음을 반복할 때가 아닙니다. 
내 본성을 얼마나 드러내느냐가 진짜 값있는 삶입니다.” 
스님의 말을 듣고 보니 성경에 있는 말이 생각났다.
‘비록 한때 애통할지라도 나의 선함은 결국 복으로 열매를 맺나니 내가 그 복을 내 때에 받지 못할지라도 자식과 그 후손들이 그 복을 받을 지이다’
“그래도 저는 애통하게 살기보다는 부자로 살고 싶습니다.”
스님은 갑자기 내 얼굴을 보았다. 스님의 눈빛이 유난히 빛나보였다. 그리고 한마디 툭 던지듯이 말을 하였다.
“부자의 개념이 무엇인지 압니까?”
나는 갑작스런 스님의 질문에 당황하였다.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였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무슨 말씀인지?”

스님은 ‘하하하’크게 웃으면서 말을 하였다.

“시간과 건강을 가진 사람이 진짜 부자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살아생전에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간다. 최선을 다해서 산다. 
그러나 그게 단지 성공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면 회한이 남을 것이다. 
잘되고자 하는 욕망이 많으면 많을수록 내 마음은 인색해지는 것이고, 그러면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가 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이 죽음인 줄을 모르고 본성을 거슬리면서 오직 자기이익을 위해서만 살았다면 그 죄업을 어느 누가 대신해서 씻어준단 말인가. 
본인 자신도 힘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진실로 여기며 허상에 집착하는 것이 바로 중생심이다. 외관에 집착하는 것이다. 당연한 본능이다. 
거지라고 해서 비천하게 대한다는 것은 중생심이다. 그 사람의 마음은 보살의 마음이 될 수가 없다.
눈에 보이는 돈, 권력, 지위 이런 것에 집착하다보면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수 있다. 
결국은 스스로 자신의 복을 감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닷가를 가보자. 
절벽에 부딪치는 파도는 감정이 없다. 무심하게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계속 찰싹 찰싹 부딪치고 있다. 
그러나 그 옆에서는 인간들이 울고 서러워하고 눈물을 홀짝홀짝 흘리고 있다.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한 점에 해당하면서도 여러 가지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살기위해 남을 희생시키고 속이는 일들은 결국 죽음 뒤에는 아무런 세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죽으면 그만이라는, 죽음이 모든 것의 단절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절대 단절되지 않는다. 
우리는 삶의 연속선상에서 단지 일순간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불과하다. 
이 몸이 없어지면 다시 다른 몸으로 바꿔질 뿐이지 우리가 갖는 의식은 계속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결국 의식이 우리가 바꿀 몸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의 성장이 중요한 것이다. 
연꽃이 구정물에서 피어나듯이 어려움과 고통을 기반으로 우리의 의식이 성장하는 것이다. 
항상 좋은 것만 추구하고 잘된 것만 추구하다가 남에게 못할 짓을 하게 되면 결국은 소탐대실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욕망에 이끌려 살다보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삶의 연속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람을 이용하는 것이다.
 
나만 잘살면 된다는 식의 씨앗을 스스로 뿌리는 거다. 그 열매가 과연 달까? 아닐 것이다. 
엄청 쓰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결국은 자업자득이 될 것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듯이 인과라는 것은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살면서 생존이라는 고통에 시달리다보면 인과를 부정하게 된다.
‘노력한다 해서 다 되는 게 아니다’ 또는 ‘나쁜 사람들이 잘만 산다’ 는 등등 실제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그런 예가 적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만 그런 것이다. 
그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살아생전에도 지옥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은 남을 영악하게 속일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은 결코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본성을 거스르고 결코 좋은 일이 있을 수 없다. 

좋은 일을 해야 마음이 뿌듯하지 남을 해칠 때 뿌듯해지는 것이 아니잖은가. 마음이 음침해진다. 이 공간에는 수를 세지 못할 정도로 수많은 파장들이 있다.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 수 있는 이유가 전파 때문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전파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에도 파장이 있다. 이러한 마음의 파장은 여러 갈래이다 보니, 좋으면 좋은 파장으로 연결되고 어두우면 어두운 파장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얼굴에 그것이 나타나는 것이다.엉큼하고 어두운 마음을 쓰면서 해맑은 미소를 지울 수 없기 마련이다.

세상일은 다 유유상종이다. 친구도 끼리끼리 만나듯이 선과 악은 끼리끼리 어울리게 된다. 선은 선끼리 악은 악끼리 말이다. 

그러니 내 파장이 어둡고 침침한 것이라면 그에 걸맞은 사건들이 뒤따라오는 것이다. 

누워서 침 뱉기처럼 그동안 살면서 뿜어냈던 독한 기운들이 그대로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게 후손에게도 다 미치는 거다. 선한 사람이 살아생전에는 사는 재주가 없어 힘들게 사는 것 같아도, 그건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한 것이다. 

지금 생 말고도 앞으로도 해야 할 멀고 먼 여행길을 생각한다면 그게 다 복으로 남는다. 후손들에게도 좋은 길을 닦아놓는 것이다. 

설령 어떤 병을 앓게 된 것도 또는 가족의 죽음도 어떤 무언의 암시라고 보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是罪亦忘) ’이라고 했다. 

모든 죄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마음으로 참회하면 그것으로 모든 죄가 소멸된다는 것이다. 

살아생전에 그런 참회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가진다는 것이 오히려 얼마나 다행인가. 비명횡사하는 사람들은 참회의 시간도 없는 것이다. 

몸은 분명 없어졌는데 자신은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계속 살아있다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럴수록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삶에 대한 그리움과 애착이 더 강해져 갈 길을 못가고 구천을 헤매는 것이다.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사명이 「순수를 추구하는 마음」 이라고 할 때 인간으로 태어나서 비록 한 발짝일지라도 그 한걸음을 내딛으면 결국 진보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한발 한발 내딛는 것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멀리 나가는 사람부터 여러 부류이겠지만, 오히려 뒷걸음치는 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 없는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렵냐하면 불교설화에 이런 표현이 있다. 

“만년 묵은 자라가 만 미터에 사는데 숨을 한번 쉬기 위해 만년에 한번 수면위로 떠오를 때 마침 떠내려 오는 통나무의 뚫어진 구멍으로 자라의 목이 탁 걸렸을 때의 확률과 똑같다.”

이렇게 어렵게 태어나서 본전도 못 찾고 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저 아득한 신라시대의 사람들이나 지금의 사람들이 변한 게 있을까. 
사람은 변한 게 없다. 다만 사는 환경만 변할 뿐이다. 시대 따라 세월 따라 변하는 게 직업이다.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더 좋은 자리,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악착같이 집착하다가 오히려 그 열에 스스로 타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기 일쑤이다. 
생존경쟁이라는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돈이나 지위 명예욕에 시달려 우리의 본성을 더럽히는 어리석음을 세세생생을 통해 욕망에 이끌려 본능적으로 해왔던 것이다. 
이제는 그것을 반복할 때가 아니다. 내 본성을 얼마나 드러내느냐가 진짜 값있는 삶이다. 
사람은 얼마나 따뜻한 마음을 가지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남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느끼는 것이 보살의 마음이다. 중생의 마음은 남의 아픔을 딛고 나의 이익을 찾을 뿐이다. 
그러니 자기도 남한테 살아생전에 그런 식으로 대우를 받을 뿐만 아니라 죽어서는 더 큰 화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물질적으로 베푸는 것도 좋지만 마음으로 베푸는 것이 더 중요하다. 따뜻한 마음으로 고마워하고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잊지 않는 거다. 
우리의 모든 죄는 마음으로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찾지 않아도 이미 있는 것을 마치 저 멀리 있는 것처럼 또는 노력해서 얻어야 할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사람 따라 장소 따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잎처럼 한평생을 안주하지 못한 채 사는 것이다.

그건 인간의 본능이 자꾸 움켜쥐고 쟁취하는 본능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뭐 하나 하고 싶어서 그것을 하고 나면 또 다른 것이 생기고, 또 하고나면 또 생기고,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다. 
단지 시간이 기다려주지 않고 건강이 뒤받쳐 주지 않기 때문에 욕심대로 다 못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나이가 먹고 병이 들고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 꼭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욕심을 접게 만들어 껄떡거리는 지친 마음을 저절로 쉬게 만든다. 포기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본성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무엇을 얻으려고 하다 보니 마음이 지쳐있는 것이다. 
우리 본성은 그대로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 자신이 스스로 왜곡하고 삶에 집착해서 못 볼 뿐이다. 
구름에 가려있다 해서 청산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안보일 뿐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입장에선 지난날의 악착스러웠던 모습, 인색했던 모습 등 이런 모습들만 남는 것이지 육신의 괴로움이 남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50 이든 80 평생이든 지난날의 세월이 모두 하룻밤의 꿈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게 바로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못 느끼면 없다고 하지만 그 많은 세월이 하룻밤 꿈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얼마를 살든지 간에 남는 것은 삶의 흔적이고, 그 속에서 자기가 가졌던 느낌들만 남는 것이다.
아귀다툼하듯이 살았거나 아수라장판에서 경쟁하듯이 살았거나 모두 그 속에서 사람들에게 행했던 그 모습들이 마음에 다 각인이 되어 있다. 
그래서 생전에 베풀고 남에게 따뜻하게 잘하라는 말이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악착같이 내 이익을 위해서 남을 밟으려고 머리 싸매고 마음 졸이고 마음 상했던 일들은 하룻밤의 꿈에 불과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썼던 그 흔적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자기가 지어야 할 짐으로 남는 것이다. 
본인이 참회를 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래서 참회가 중요한 것이다.

난이 피고지고 또 피듯이 육신이 소멸하여 텅 빈 고요한 우리 자성 다시 말하면 순수의 경계도 될 수 있고 순수에너지 또는 파장에서 새로운 변화가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처럼 내 파장에 따라서 만나는 사람들이 정해지듯이 죽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내 파장이 과연 어느 정도로 순수함을 가지는가에 따라 그 파장에 따른 새로운 변화가 나오는 것이다. 
순수의 경지는 결국 해탈의 자유 즉 모든 인연으로부터의 해방과 윤회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오로지 내외의 경계가 없는 깊은 고요이다. 바람이 불어도 물결이 치지 않는 깊은 고요, 평안함이다.
이런 느낌들이 없으니까 금생의 삶이 나에게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남보다 더 으스대면서 대우받고 잘 살아보려고 갖은 애를 다 쓰는 것이다. 
영악하게 머리를 돌리고 두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고 또 매몰차고 매정하게 마음을 쓰면서 말이다. 
결국 자기에게 닥친 불행이나 어려움은 자기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따뜻한 마음 하나만 가져도 모든 게 갖춰진다는 것을 모르고 말이다. 
자신은 분명 길을 똑바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길을 모른 채 헤매는 격이다. 
돈이나 지위 등 그러한 권위가 마치 자신을 대변해주는 것처럼 착각을 하기 쉽다. 가짜의 나를 하나 새로 만들어서 그것을 유지하는데 전력을 다한다. 
결국 허망한 것인 줄 모르고 말이다. 

진실로 자기 것은 없다.

이 육신도 내 것이 아니다.
잠시 빌렸다가 되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육신이 자기 것인 줄 알고 집착을 한다.
그러니 잘 먹어야 하고, 일생동안 부지런히 모으려고만 한다. 결국 하나도 못가지고 가면서 말이다. 이것저것 얽매일 것이 많아진다. 
그러면서 힘들다고 한다. 애쓴 것이 많으니 죽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허망하겠는가? 그러니 불행한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오라고, 오라고 초대를 해도 안 오는 곳이 천국이고, 오지 말라고 그렇게 애를 쓰고 말려도 오는 곳이 지옥이라고 한다.
남에게 자비와 따뜻함을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편견과 냉소적인 경우가 많다. 
남에게 점잖고 그럴싸한 사람으로 보일 수는 있어도 결코 자기 자신은 못 속이는 것이다. 
본능에 시달리는 자신을 말이다. 종교라는 것도 그렇다. 정작 종교의 가르침을 아는 사람들은 종교가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하느님이나 부처님이 나만을 따르라고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이 스스로 편을 가르고 그러는 것이다. 
결국은 죄짓지 않으려다가 죄만 더 짓는 격이다. 한순간 깨달을 수는 있어도 그것을 유지하기는 더욱 어렵다. 
마음에 남아있는 잘되고자하는 본능의 마지막 점하나까지 지워버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런 점에서 볼 때 나 역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깊은 우물도 바닥을 알려면 그 깊이까지 내려가 봐야 알게 되듯이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본능이라는 마지막 점하나 남은 지점까지 내려가는 것만 해도 어지간한 노력과 끈기가 아니면 내려가지도 못하다. 
그렇지만 내려간다 해도 마지막 점하나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동안의 깨침은 사소한 것이었고, 결국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모르면서 착각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사람이 잘 먹어야 힘을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먹는 것보다는 어떤 기운을 먹고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무엇을 가지려고 하거나 추구하려고 하다보면 그 집착의 기운이 결국 우리 몸을 태우는 것이다.

독한 기운이 우리 세포 마디마디에 박히는 것이다.
게다가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서 그런다면 결국 우리 세포는 하루하루 썩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탐심이 많은 사람은 이슬처럼 고운 얼굴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자타불이(自他不二)이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 뿜어 나오는 기운을 생각해보면 그게 좋은 기운일까?
자꾸 그런 기운을 몸속에 간직하고 있으니 결국은 스스로 몸이 못 견디는 것이다.우리 주위에는 명성이나 이익을 얻으려고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가지려고 하거나 추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남에게 따뜻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보이는 외관에 따라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부나 지위에 따라 사람을 대하다보면 자기 자신 역시 조그마한 명예와 권위를 지키려고 발버둥 치게 돼있다. 
비록 적게 가졌더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어 본 사람이 자신의 삶의 뜰이 더 넉넉한 것이다. 

찾지 않아도 이미 있는 것을

그동안 열심히 애써왔던 것들이

또 하나의 나를 만들기 위한 공허함

손에 잡히는 실체가 아님에도

결국 남는 것은 부끄러운 행적뿐

나 자신에게 속았다네.

 

구름 속에 살았다는 것을 알고

청산을 보고자 마음먹었지만

이 또한 어리석은 이야기

마음내서 찾을 정도로 멀리 있지도 않은 것을

구태여 찾으려고 애를 썼다네.

찾지 않아도 이미 있는 것을

태어나기 전 나, 죽어서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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