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암자 기행
태안사에서 100일 기도를 하던 대원스님이 100일 기도를 마쳤다. 스님은 같은 문도이자 같은 연배인 다른 스님과 같이 만행을 다녀온다고 하였다. 나도 같이 그분들과 같이 가기로 하였다. 차는 기도를 100일 내내 같이 했던 광양보살이 제공해준 지프차를 타고 갔다. 수동기어였지만 대원스님은 차를 잘 몰았다. 지리산 산길을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스님들과 같이 간 곳 중 기억나는 데가 지리산 함양 마천면이다. 단위 면적당 절이 가장 많이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상무주, 영원암, 도솔암 등 유명한 암자들이 있다. 지금은 그런 암자들을 순회하는 여행 프로그램이 있지만 예전에는 그야말로 맘을 크게 내서 찾아가는 곳이었다. 88고속도로를 따라 인월쪽으로 빠지면 함양으로 향한다. 그 방향으로 계속 가다가 마천이라는 팻말이 나오면 오른쪽으로 다리를 넘어 조금 가다보면 실상사가 나온다. 그 절을 지나 계속 가다보면 두개의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은 지리산 백무동 계곡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비포장길로서 당시에는 아무런 팻말이 없었다. 그 비포장길을 따라가야 암자들을 갈 수 있다. 걸어 가려면 약 한두시간 족히 걸어야 한다. 해발 1100m 정도 되기 때문이다. 그곳을 가기 위해 택시를 부르면 코란도가 온다. 그러니 길이 험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많이 정비해놨지만 그때는 승용차로 올라가는 것이 부담되었다. 올라가는 것은 그렇더라도 내려올 때 제동을 걸면서 내려와야 하기 때문에 타이어 타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그것을 감수하고 그 길을 따라 꼬불꼬불 올라가다보면 영원암(지금은 영원사)라는 절이 나온다. 사람들이 머무는 요사채를 현대식으로 지어서 방에 딸린 욕실에서 따뜻한 물로 샤워도 할 수 있는 곳이다. 세상 참 좋아진 것이다. 그곳 법당은 다른 절의 법당과는 다르다. 선방으로 쓰려고 지어놓은 건물을 법당으로 쓰고 있다. 그곳에 있는 주지스님은 나이가 많이 드셨는데 겨울에 추위가 심해 감기가 자주 걸려 몸이 나빠지는 것을 걱정한 상좌들이 경주에 모셨는데 답답하면서 다시 올라오셨다고 하였다. 그렇게 높은 산에서 한번 살던 사람은 평지에서 못살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곳에서 좁은 오솔길로 계속 올라가다 보면 상무주암(上無住庵)이 나온다. 무주라는 말은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아주 고즈넉한 곳이다. 수행자의 처소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특히 상무주의 현기스님은 공부를 많이 하신 스님이라면서 같이 간 스님들이 그분을 친견하고자 했다. 스님들은 현기스님을 뵙고 삼배를 드린 후 법문을 청하였다. 그러자 스님은 “내 말을 누가 듣는가.”라고 물어봤다. 그리고 “귀가 듣는 게 아니죠.”라고 말씀하셨다. ‘그 듣는 이가 주인공이다’라는 취지였던 걸로 기억한다.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 암자에서 내려올 때 현기스님은 무거운 가스통을 배달차가 다니는 길목까지 내려놔야 한다면서 같이 길을 내려왔다. 산에 살면 지게를 매는 게 일상생활이다. 중간에 서로 교대하면서 비탈진 산길을 내려갔다. 물론 나도 지게를 지었다. 스님들끼리는 서로 법문을 청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누가 ‘공부를 많이 한 분이다’라는 소문이 나면 그를 찾아가 법문을 청하는 게 전통이었다. 요즘에야 차가 있어서 하루만에도 쏜살같이 다녀오지만 옛날에는 몇 달을 걸려 가야만 했을 것이다. 조선시대만 해도 묘향산과 금강산 그리고 지리산 정도는 다녀와야 공부 좀 했다고 한다.
도솔암은 올라가는 입구를 찾기가 힘들다. 사람들 찾아오라고 하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 찾아오지 말라고 하는 곳이다 보니 팻말이 없다. 수행자가 수행하는 암자이기 때문에 몇 번을 다녀봐야 입구를 알게끔 해놨다. 영원사에서 1시간 정도 올라가면 경사가 끝난 곳에 암자가 보였다. 첫느낌에 ‘누가 봐도 명당이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오른쪽 옆으로는 법당이고 앞으로는 사람이 기거하는 오두막집이었다. 널빤지로 만든 것처럼 소박해보여 법당보다는 그게 더 눈길을 끌었다. 전망이 탁 틔인 곳이라 천왕봉이 바로 눈앞에 있듯이 너무 잘 보였다. 그때도 여러명의 사람들이 단체로 올라와서 누군가 지관이 풍수를 말하면서 이곳만큼 좋은 데가 없다고 설명하였다. 맞는 말이었다. 누구나가 와도 감탄사가 나올만 했다. 지금은 불사를 해놔서 당시의 아담하고 소박한 분위기는 나지 않을 듯 싶다. 도솔암은 조계종 종정을 역임했던 혜암스님이 수행했던 곳으로 유명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도솔암은 수좌들 사이에는 한번쯤 가볼만한 곳으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풍수를 공부하는 사람들도 꼭 한번 들려야 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서쪽바람을 막기 위해서 창고를 지었다는 풍수이야기는 들을 만 했다. 지리산에서 도솔암이 워낙 유명한 곳이라 가끔씩 언론을 타곤 하였다.
지리산 묘향대 스님이야기
우리나라 암자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게 지리산 묘향대라고 한다. 묘향대에 직접 살았던 노스님을 사법연수원 시절 태안사에서 뵌 적이 있었다. 공부를 여법하게 잘하신 분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그분은 결혼하여 처자식이 있었지만 늦게 출가하여 공부를 하다가 묘향대에서 상당기간 생활하던 때였다. 어린 자식 두 명이 아버지를 보고 싶어 수소문 끝에 속리산 법주사를 거쳐 지리산까지 올라왔는데 눈오는 겨울날 올라오다가 길을 못 찾고 얼어 죽었다. 겨울이 끝나고 눈이 녹자 자식들을 직접 발견했을 때 그분의 심정이 느껴졌다. 애절한 이야기이지만 그분은 그 뒤로 수행을 더 열심히 했다고 한다. 가정을 버리고 출가한 사람이 꽤 있다. 성철 스님도 그렇다. 어느 스님의 경우 아내가신심이 있다 보니 흔쾌히 허락해줘서 출가를 했다는 분을 만난 적도 있다. 가정을 버리고 출가하는 이유는 뭘까? 원효스님도 설총을 낳았지만 평생 전국 명산을 돌아다니면서 수행을 하였다. 그분의 말씀 중 가장 기억나는 말이 있다. 막속급호! 막속급호! 급하구나 급하구나. 이 몸 가면 언제 받아 공부하겠느냐면서 가장 시급한 일이 마음공부라고 강조하는 말이다. 세상에서 잘되고자 한평생 용을 쓰면서 살지만 부처님은 잘되고 못되고가 없다 했다. 단지 자기가 만들어 낸 허상에 속아 산다고 하였다. 화택이라고 하였다. 불에 타는 집에 살면서도 나오라고 그렇게 소리쳐도 나오지를 않는 게 중생이라고 한다. 중생의 업력은 된다 안 된다 개념에 꽉 사로잡혀 헤어나지를 못한다고 하니 인생이 다하여 죽을 때쯤 되어도 만족을 하지 못하고 계속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애를 쓴다고 한다. 허망한 인생이다. 성인의 눈으로 보면 분명히 보이지만 중생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으니 눈에 보이는 게 전부다. 그래서 중생으로 살다 외롭고 적적하게 허망하게 살다 가는 게 태반이다.
사법연수원 시절 태안사에서 노스님을 뵈었다. 청화스님이 정진하였던 토굴에 젊은 상좌와 거주하고 계셨다. 스님이 말씀한 것 중에 지금도 기억난 게 있다. 좀 황당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현실적이었다. 교도소에 있는 수형자들을 갇아 놓지만 말고 자급자족하게 해주라는 내용이었다. 실제 이런 식으로 교도행정을 펼치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