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화엄사]
1998년 사법연수원 2년차 상반기에는 시보생활을 하던 때였다.
법원 시보를 한 후 검찰시보를 하다가 마지막을 변호사 시보를 하였다.
당시 자주 갔던 절이 구례 화엄사와 옥과 관음사였다.
둘 다 스님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스님 모두 합격하던 해인 1996년에 곡성 태안사에서 만났다.
당시 곡성 태안사 주지를 했던 종걸스님이 화엄사 본사주지를 하고 계셨다.
스님은 법명 그대로 걸걸하였다. 말없이 상대를 제압하는 강한 기운이 있었다.
당시 태안사에서 세 달 넘게 있다가 사법고시 합격발표를 앞두고 절을 떠나겠다고 인사드렸던 적이 있었는데 “방 하나 줄테니 그대로 있어.”라고 해준 말씀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세상에 내세울 게 아무 것도 없는 별 볼일 없는 고시생에게 맘을 써주는 게 고마웠다.
그런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마음 속에 간직되는 것 같다.
합격을 한 후 다음해인 1997년에 연수원을 다니면서도 틈만 나면 화엄사를 드나들었다. 종걸스님 덕분이었다.
불시에 가도 항상 편하게 머물 수 있었다. 주지를 안다는 게 그만큼 힘이 되었다.
간간히 어느 절이 좋냐고 물어보는 이들이 있는데 그때마다 하는 말이 “나를 반겨주는 절이 제일 좋습니다”라고 말해준다.
절이 아무리 좋아도 나를 반겨주지 않으면 썰렁하기 그지 없다. 절에 모인 사람들은 부처님 하나 보고 모였기 때문에 인연따라 만나지만 막상 헤어지면 지극히 남남이다.
인연을 함부로 만들지 않는다는 불가의 가르침 때문일지도 모른다.원주 소임을 보던 분과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절에 가면 마음이 편했다.
지리산의 기운을 구례읍에서부터 느낄 수 있으니 화엄사 절에 머무르면서 기도를 하면 심신이 맑고 머리도 개운해진다.
게다가 머무는 처소도 좋았다.
화엄사를 세운 통일신라 시대 연기조사가 어머니에게 차를 공양하는 장면을 형상화 한 화엄사 사사자 석탑이 있는 곳이 화엄사에선 가장 명당 터라고 하는데 화엄사에서 노고단이 제일 잘 보이는 곳이다. 원주는 나보고 잘 되라고 화엄사 기운을 가장 잘 받는다는 그 석탑을 정면으로 보는 방을 내주었다. 방 크기도 아담하였다. 방이 너무 커도 기운을 머금고 있지 못한다고 하였다. 인면 닿는 대로 나를 따라서 절밥을 얻어 먹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화엄사는 뭐든지 규모가 크다. 석탑과 석등도 그렇고 건물도 그렇다. 특히 새벽 동이 틀 무렵에 보면 그 실루엣이 장관이다. 화엄사는 대웅전도 큰데 그보다 더 큰 우리나라 최대 목조건물인 각황전(覺皇殿)
이 있다. 거기서 예불을 드리다 지루하면 천장을 쳐다보곤 하였다. 높이가 15미터나 되니 천장의 단청을 구경하려면 고개를 최대한 젖혀야 볼 수 있었다. 정면 7칸 26.8m, 측면 5칸 18.3m나 된다. 각황전은 조선 숙종때 명필인 이진휴가 썼고 숙종이 사액을 내렸다고 한다. 임금이 이름을 쓴 편액을 내리는 것을 사액이라고 하는데 유교사회에서 임금이 절을 중건한다는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각황전에는 중창하게된 설화가 내려온다.
각황전의 원래 이름은 장육전이다. 부처님의 몸을 장육이라고 하는데 등신불처럼 황금으로 두른 부처님을 모시고 법당 벽 사면에는 화엄경을 새긴 돌로 둘렀다고 한다. 의상대사가 화엄학을 전파한 곳이 화엄사였다. 그런 장육전이 임진왜란으로 소실하자 이를 중건하기 위해 당시 주지인 벽암 선사가 화주승을 뽑아 시주를 받으러 길을 떠나게 하였다. 그는 무작정 길을 떠났는데 꿈에서 게시받은 대로 첫번째 만난 이에게만 시주를 요구하고자 하였다. 근데 처음 만난 이가 거지 노파였다. 불교 설화에는 이런 구도가 자주 나온다. 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에 따라 차별을 하지 말라는 의미도 있을 것이고 물질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도 있어 보인다. 그 노파가 무슨 돈이 있겠는가? 거지에게 63빌딩 지을 돈을 시주하라는 것 자체가 제 정신이 아닌 거지만 그러면 종교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부처님은 철저히 인연법을 설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설화도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 거지 노파는 죽어서 귀한 집에 태어나 불사를 하고자 하는 원력을 빌고 스스로 물에 빠져 죽었다. 그러자 자신의 말도 안되는 무리한 요구에 노파를 죽게 한 죄책감에 화주승은 세상을 방랑하다 중국 수도까지 가게 된다. 근데 중국 황제의 귀여운 공주는 태어나면서 부터 한쪽 손을 펴지 못하고 꽉 쥔 채 살았다. 어느 날 유모와 함께 거리로 나온 어린 공주는 갑자기 스님의 옷을 잡아 당겼다. 주먹이 펴진 것이다. 근데 공주의 손에는 부처님 몸을 의미하는 장육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황제가 스님을 불러 자초지종을 들으면서 거지 노파가 장육전을 중창하기 위해 공주로 태어난 사실을 깨닫고 황제를 깨우쳤다 해서 각황전이라 이름하고 불사할 돈을 내렸다는 설화가 내려온다. 설화가 여러 종류인데 어떤 설화는 숙종의 공주로 묘사하지만 실제 숙종에게는 공주가 없었다고 한다. 화주승도 계파 선사로 묘사하기도 한다. 설화는 민중들이 만들어 내기 때문에 약간씩 다르기 마련이다. 분명한 점은 숙종이 각황전이라고 사액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이런 비슷한 설화가 부처님 이마의 도끼다. 비만 오면 불상에 빗물이 떨어지는 경남 산청 심원사 주지가 깨진 기와장이라도 불사하고자 길을 떠나면서 전날 꿈에 게시받은 대로 처음 만난 사람에게만 시주를 요구해야 하는데 하필이면 머슴을 만나 주저하다가 결국 말을 꺼냈는데 왠걸 머슴은 평생 모은 새경을 시주하였다. 주지는 부처님이 복을 줄 거라 축원해줬지만 머슴은 복을 받기는 커녕 시름시름 앓다가 한번은 장님으로 한번은 앉은뱅이로 앓다가 시주한 지 얼마되지 않아 죽어버렸다. 무심한 부처님에게 실망한 주지는 한낱 불상에 불과한 목불에 속았다 생각한 나머지 도끼로 이마를 내리쳤는데 도끼가 빠지지 않았다. 이후 미련없이 세상을 방랑하다 세월이 흘러 다시 절에 찾아 온 날 마침 고을에 새로 부임한 젊은 원님이 그동안 어느 누구도 빼지 못한 도끼를 쑥 빼버린 모습을 구경하게 되었다. 근데 그 도끼날에는 화주시주상봉이라는 글이 씌여 있었다. 시주를 권한 화주와 시주한 시주자가 서로 만난다는 의미다. 그럼 스님과 머슴이 만난다는 건데 스님은 있고 머슴은 죽었는데 어떻게 만난단 말인가? 결국 원님이 전생의 머슴인 것이다. 머슴은 업이 두터워 설령 사람으로 요행히 태어나도 삼생을 비천하게 살아야 했다. 한번은 머슴, 한번은 장님, 한번은 앉은뱅이였다. 그러나 그가 시주한 공덕으로 금생에 한번에 다 받아 결국 다음 생에선 귀한집에서 태어나 원님을 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런 불교설화를 접하는 사람마다 반응이 다 다르다. 말 같지 않은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냉소를 퍼붓는 이부터 머리가 지근지근 아파하는 이도 있는가 하면 환희심을 내는 이도 있다. 실제 내가 그랬다. 합격하던 해에 그 내용을 적은 유인물을 등산하고 내려오면서 우연히 읽으면서 그동안 고시가 합격이 안되고 인생이 꼬인다는 생각이 한순간에 긍정으로 바뀌어버렸다. 받아야 할 업력은 피할 수 없는데 어차피 받을 거면 당대에 한꺼번에 받는 게 낫고 그것도 젊고 힘있을 때 받는 게 낫다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참 복있는 사람이구나’, ‘부처님이 나를 참 사랑하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뒤로부터 지금까지 내 인생을 한탄하거나 부정하는 일이 없었다. 어려움이 있어도 다 업의 소멸 과정으로 생각해 버린다. 간혹 미끄러져 똥물을 뒤집어 쓰는 어리석음을 범하곤 했는데 업의 대가를 절대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얼른 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게 이런 불교설화에 환희심을 냈던 덕이라고 본다. 개떡이어도 찰떡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기 능력이다. 자기 눈이 밝지 못해 혜안이 열리지 못함을 탓할 뿐 세상이나 남을 탓할 필요가 없다. 개인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다. 부처님도 태어났던 조국의 침공을 몇번이나 막아줘도 마지막은 막지 못했다. 공업을 피할 수 없다고 하였다.
불교설화가 생명력을 유지하고 계속 내려오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쓰는 단어 속에 다 진리가 담겨 있다고 본다. 그러니 계속 사람들이 쓰는 이유일 것이다. 사물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긍정으로 볼건지 부정으로 볼건지 자기 업의 결과물인 것 같다. 불교설화의 공통점이 있다. 사람을 외관에 따라 분별하지 말라는 것이다. 눈으로 보는 게 전부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세계가 더 크다는 점이다.
남이 보더라도 별볼일 없어 보이는 머슴이나 거지 노파라도 마음을 순수하게 쓰면 숙세의 업장을 소멸할 수 있듯이 외관이 아니라 본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불교설화가 강조하는 것 같다. 만일 화주승이 머슴이나 거지 노파를 무시하고 말도 건네지 않았다면 시주를 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살면서 항상 느끼는 게 사람이 사람을 몰라보는 죄가 크다는 것이다. 주위에 불보살이 있음에도 이를 보지 못하고 하심하지 못하고 고개를 함부로 쳐들고 목에 힘줄 때마다 항상 장애가 생겨 순풍에 돛달듯이 순항할 것도 역경계에 걸려 진척을 보지 못하는 것을 겪었다. 하심(下心)이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해주는 신장 역활을 하는 구나 요즘들어 많이 느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