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세청에서의 5년] 34 나비효과(카오스이론)
2004년 10월에 쓴 글이다. 노무현 정부 2년 차 때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분위기가 똑같다. 날짜를 2018년 12월이라 해도 상관없을 정도다.
세상사는 것이 왜 어렵냐면 서로가 서로를 잘 인정을 안해주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한 마음만 가진다면 훨씬 수월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말이 그렇지 그게 쉬운 일인가. 따뜻하게 대해줬다가는 속임을 당하거나 이용당하기 십상이다.
세상에는 자기이익을 위해 사람을 이용하거나 속이는 사람들 천지라고 봐도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능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다. 팔이 안으로 굽지 바깥으로 굽혀지지 않듯이 인간은 본능대로 행동하지 그것을 거슬러 행동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위하여 사람을 대한다고도 볼 수 있다.
남에게 떡하나 사주지도 않으면서 이래라 저래라 간섭은 많이 하는게 또한 본능이다. 잘되면 자기 공이고 못되면 자기 책임이 아니다.
가령 사업계획서를 가지고 다니는 회사들의 경영진을 보면 남의 이름을 도용하거나 폼으로 걸어놓는 한마디로 회사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을 구색맞추기용으로 걸어놓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한 회사가 어렵거나 답답한 상황이라면 사람과의 신의를 저버리는 행동을 하기 일쑤이다. 내 똥줄이 타면 남의 마음 아픈 것은 전혀 신경써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세금은 그 사람들에게 다 나간다.
전적으로 남을 위해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는다해도 의지나 생각만으로는 결코 잘되고 싶은 본능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그런 마음을 먹었다는 것만으로도 이기적인 본능으로만 가득차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퍼센트가 얼마나 적느냐에 따라 덕을 쌓는 것이다. 점점 더 이기적인 본능이 없어지고 마지막 0.1%정도 남은 마지막 점까지도 지워버릴 수 있다면 우리는 그런분들을 성인으로 존경할 수밖에 없다. 과연 그럴수 있을까. 내 목에 칼이 들어올때 솔직히 살고 싶지 어느 누가 죽고 싶겠는가.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의미하듯이 자기가 자기 마음을 제대로 알기가 힘들다. 그러기 때문에 나를 믿어달라고 호언장담을 하다가 결국은 배신을 하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 많이 보아왔다. 자기 마음의 정체를 어느정도라도 안다면 남에게 확신에 찬 말을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의 본능은 전적의 남의 이익만을 위해 헌신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촌이 땅사면 배아프듯이 이상하게도 남 잘되는 것에 칭찬과 성원을 보내는 것보다는 잘못된것에 자위를 느낀다. 세상에는 덕이 많은 사람보다는 자기중심으로 자기 이익을 위해서 평생 본능대로 살아온 사람들이 몇백배 아니 몇천배 더 많다. 그러니 세상사는 것이 도덕교과서에 나온 것처럼 살다가는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순진하고 바보취급을 받을 수 있다. 영악하고 영리하게 그리고 살짝 살짝 거짓말로 임기응변이 뛰어나는게 세상살이를 잘하는 즉 처세에 뛰어난 사람들이다.
솔직히 정직하게 사는 것이 어렵지, 남을 속이면서는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 그래야 돈도 번다고 생각하는 게 사람들사이의 자조섞인 말들 아닌가.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공부를 잘하면 제도권내에 쉽게 진입이 가능하다. 여기서의 제도권이라는 것은 그 나이에 맞는 단계 단계를 잘 거쳐나간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대학교도 좋은 대학, 그리고 좋은 직장으로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이게 잘 연결이 안되면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데 위와같이 사방천지가 남을 위하는 사람보다는 어떻게든지 먹고 살기위해 남의 아픔을 발판으로 사는 사람들이 태반이라고 해도 되는 험한 현실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차라리 그러한 대가를 공부로 지불했다면 수석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만큼 사회가 사람들을 대하는 게 매정하고 냉정하다는 것이다.
결국 사랑이 있는 사회, 사랑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가 선진사회이고 좋은 세상이지만 옛날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사랑은 영원한 화두가 될 것이다. 웃음은 위로 올라가 열로 발산되지만 슬픔은 밑으로 가라앉아 앙금이 된다한다. 이 세상에는 웃음보다 슬픈 일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슬픔을 치료하는 약은 사랑이라고 한다.
국민소득은 10년째 늘지 않은채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파이를 키워서 먹으려는 생각보다는 이젠 남이 나보다 더 먹은 것을 보게 된다. 앞을 보기보다는 자꾸 옆의 사람들과 비교하게 된다. 불만이 쌓여간다. 서로 같이 나눠먹자는 사람들이 자꾸 많아진다.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은 뭔가 뒤가 구린 사람들이다는 식으로 시각이 점점 삐딱하게 되어간다. 부자와 사업자 보기를 적으로 안다. 마치 그들을 전투하듯이 대하게 된다. 분배와 평등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진다. 성장과 능력의 차별이라는 말을 듣기가 힘들어진다. 이런 분위기가 언젠가 바닥을 칠때쯤이면 반동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가는 누가 치러야 하는가?
조직생활을 하다보면 사람들이 나이가 먹어갈 수록 마음이 순수해지는게 아니라 술수만 늘어가는 사람들을 간혹 보게된다. 생존의 기술만 늘어가는 거다. 그만큼 세상살이가 힘들다는 증거일 것이다. 사명감보다는 적응이 먼저고 나 편안게 최고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은 다 반동이고 저항을 해야 한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은 다 싫은 사람들이고 욕을 먹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한 일이 뭐지? 나 잘되게 해달라는 것?
공무원에게 사명감이 없으면 참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나 불편하게 하는 것은 다 싫으니까. 나 편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사람들을 아쉽게 해야 한다. 군대고참이 나에게 가르쳐준 말이 있었다. ‘상대방을 최대한 아쉽게 해라.’ ‘맞고 커라’ 그러나 만일 이렇게 되면 사회가 전부 군대문화로 뒤덮일 것이다.
흔히들 “민이 관을 만나는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공무원은 국민에 봉사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서비스행정을 하면 나만 불편해지는데 누가 그렇게 할려고 하겠는가? 설령 제도가 만들어져도 나 불편하게 하면 다 싫은거다. 제도는 제도고 내가 안따르고 안하겠다는데 어쩔 것인가? 위에서 쪼면 납작하게 엎드려 있으면 된다. 시간지나면 다 흐지부지되는게 한두번인가.
우리 과의 업무는 권리구제기능이 단연 으뜸이다. 소송에선 질 것은 지고 이길 것은 확실히 이겨줘야 한다. 불복업무에선 부실과세에 대하여 구제와 견제기능을 해줘야 한다.말은 참 그럴싸하지만 설령 그렇게 안해도 조직은 다 잘돌아가게 되어있다. 내가 없어도 조직은 전혀 아쉬워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스스로 실속을 챙겨야 한다. 조직에서도 가장 편한 과, 편한 업무를 해야 한다. 그래야 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업무는 최소한 간소화해야 한다. 내가 맡은 이의신청사건들을 인용 한 번씩 해주려면 일이 많아진다. 게다가 나 모르는 사람이라면 더 그렇다. 왠만하면 기각으로 하는게 좋다. 아는 사람이라면 부실과세로 인용할 수도 있다. 나머지는 국세심판원에서 알아서 할 것이다. 그러니 부실과세로 취소되는 건수가 많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송은 국세심판원 기각결정문을 배껴쓰면 된다. 그러다 판사가 숙제를 내주면 한번 하고 안 내주면 그냥 넘어가고. 조그만 코투리가 있으면 기일추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선행사건 판결등 재판의 전제가 되는 사건결과를 보고 판단하자고 재판을 연기해주는게 기일추정이다. 사무실에 굳이 꼭 나올 필요는 없다. 누가 찾으면 법원에 출장갔다고 말하라고 하면 된다. 머리 쥐어짜면서 소송수행할 필요는 없다. 지든 이기든 국가가 지지 내가 지는게 아니다. 내 호주머니에 돈이 나간다면 쌍불을 켜야 할 것이다. 구매승인서 지금사건이 바로 이런 케이스다. 나중에 사후 약방문 식으로 허겁지겁 서둘러봤자 버스지난 뒤에 손흔들기다. 대리권도 없는 세무대리인이 사무실에 들어와 불복신청사건 설명을 해도 상관없다. 나와 잘 알면 된다.
일단 한번 내 손에 들어온 사건은 전부 다 내가 결정을 한다. 내가 기각이라고 하면 기각이고 인용이라 하면 인용이다. 내 결정에 토를 다는 사람들은 나를 귀찮게 하는 사람들이다. 무슨 지시가 있어도 안 따르면 되는거고 정 뭐라 하면 관리자든 뭐든 한번 붙으면 된다.
이왕 승진에 희망이 없는 이상 내 실리만 챙겨 나가면 되는 거다. 공직의 끈이 그래도 붙어있을 때 준비해놔야 한다. 어느 조직이나 일 잘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 몇몇 사람들과 같이 묻혀 가면 티도 안난다. 관리자라 해봤자 기분나쁜 소리 못한다. 어차피 잠시 스쳐가는 인연인데 구태여 나쁜 소리 들을 바보가 있겠는가.
현대사회는 행정의존시대라고 한다. 그만큼 행정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사회다. 그런데 행정을 이끄는 구성원들이 나 편한게 최고, 구제보다는 규제하는 식으로 계속 움직인다면 어떻게 될까? 국부유출과 해외이민, 청년실업 증대, 청소년 범죄의 흉폭화 등등이 과연 나와 무관한 일일까? 그게 내 일이고 내 가족에게 닥칠 일이라면 어떻게 될까?
작년에 열반하신 청화큰스님이 법문하면서 말씀하셨던 나비효과가 자주 생각나는 요즘이다.
중국 베이징[北京]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다음 달 미국 뉴욕에서 폭풍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과학이론이다. 에드워드 로렌츠가 기상 관측을 하다가 생각해냈다고 한다.
에드워드 로렌츠가 기상 관측 시뮬레이션을 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기상 환경 수치를 넣으면 결과 값이 나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에드워드 로렌츠가 수치를 잘못 입력했는데, 그 오차가 매우 작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기상 관측 결과가 나온 것에 착안하여 이 이론을 발표했다고 한다.
즉, 자연계라는 혼돈에서는 다양한 소용돌이가 일어나는데 큰 사건 뒤에는 처음엔 감지조차 되지않은 작은 변화에서 비롯된다는 뜻이다. 따지고 보면 기상의 경우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사회의 모든 분야에서도 이러한 이론이 적용된다. (주식, 경제 등..)
이른바 ‘초기 조건에의 민감한 의존성’, 곧 작은 변화가 결과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경우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04. 10.21. 새벽 3시 55분 새벽의 기운을 먹으면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