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진 실패 소중한 발견] 13 운을 불러들이는 실력
군대 가기 전, 20대 중반에 치른 2차 시험 마지막 날이었다. 이전 3일 동안 큰 실수가 없었기 때문에 올해는 합격할 수 있겠다는 기대가 내심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오전에 보는 형법과목이었다. 유난히 그 해에는 그 과목에 대한 예상문제가 나돌았고 실제로 50점짜리 문제 1개와 25점짜리 약술형 문제 1개가 예상대로 출제되었다. 물론 예상문제에 대해서는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험감독위원들이 들어오기 직전에 ‘올해는 개념문제가 나오는 해이므로 예상문제 1순위인 장물의 개념 외에 재물의 개념도 얼른 한 번 훑어봐야지’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지만 만약 나온다면 낭패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답안지를 받기 직전까지 열심히 외웠다.
드디어 문제가 적힌 두루마기가 펼쳐지면서 약술용으로 재물의 개념이 나왔다. 내심으로 쾌재를 불렀다. 방금 전에 봤던 거라 기억이 잘나는데다 신이 나서 열심히 적다보니 일찍 시험장을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나보다 더 먼저 나와 있던 친구가 말하기를 “고맙다. 네가 찍어준 장물의 개념이 나왔다.” 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였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분명히 답안을 쓰면서도 문제를 두세 번 봤다고 생각하는데 ‘장물(臟物)이 어떻게 재물(財物)로 보였을까?’이다. 장물의 ‘臟’자와 재물의 ‘財’자는 부수가 서로 비슷할 정도이지 글자가 전혀 다르다. 결국 눈에 뭔가가 씌었다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 내 발목을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합격하던 해였다.
1차 시험장에 도착해보니 몇 사람밖에 와 있지 않았다. 그런데 내 오른쪽 옆 앞자리 즉 대각선으로 앉아있는 사람한테 신경이 쓰였다. 발을 무의식적으로 계속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저주저하다가 발 떠는 것을 멈춰 줄 수 있겠느냐고 정중하게 요구하였다. 수험생은 미묘한 심리에 의해서도 기분이 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그가 흔쾌히 받아주었다. 그렇게 해서 그와의 첫 대면이 이루어졌다. 문제가 생긴 것은 오후 시간이었다. 객관식 답안지는 OMR 카드이므로 각 과목당 코드번호를 기재해야 한다. 나는 국제사법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 과목 코드번호를 적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국제법 코드를 적는 실수를 했다. 그런데 이런 잘못을 오른쪽 대각선 자리에 앉아있던 그가 문제지 도착 직전까지 모든 수험생이 고요히 숨을 죽이고 있는 시간에 뒤돌아 본채 나의 OMR 카드를 유심히 쳐다본 후 위 실수를 지적해 주었다. 시험을 그렇게 많이 봤지만 뒤에 있는 사람의 얼굴정도는 볼 수는 있어도 답안지에 적힌 코드번호까지 보고 그 잘못을 시정(是正)시켜준다는 것은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만일 그의 지적이 없었다면 1차 합격은 물 건너간 것이 되었을 것이고 그러면 그해 2차합격도 없었을 것이다. 하늘이 사람을 보내주어 합격을 도와주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기억나는 대로 간단하게 기술하였지만 이와 같이 상반된 경험을 하면서 확실히 ‘시험에는 운이 존재한다’는 것과 ‘합격하기 위해서는 운이 따라줘야 한다’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떨어지는 사람들은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도 모두 다 실패원인으로 돌리지만, 합격한 사람들은 얼떨결에 합격한 것 같아 운이 좋았다는 말밖에 안한다. 실상 열심히 공부한 사람들 사이에 실력의 차이가 있다면 얼마나 있겠는가. 당락이 결정되는 것은 결국은 운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클 정도로 중요하다. 운이『있다』,『없다』보다는 운을 불러들일 수『있느냐』,『못하느냐』가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왜냐하면 운을 불러들이는 능력이 진짜 실력이기 때문이다.
그 판단은 읽는 사람의 몫으로 남기고 싶다. 단지 느끼는 점 한 가지가 있다면 「남이 보더라도 편하도록 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운동을 잘하는 사람들치고 폼이 나쁜 사람이 없듯이, 내 얼굴보고 다른 사람이 편함을 느끼면 좋은 것이고, 더군다나 마음씀씀이도 그렇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다. 공부는 책으로 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도 있기 때문에 인색한 모습보다는 여유 있는 모습이 더 낫다고 본다. 따라서 마음을 다스리는 것도 꼭 해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간단히 요약하면 아마 이렇게 표현될 것 같다.
시험은 운이고 운은 실력 있는 사람 그리고 마음을 다스린 사람에게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