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네가지 파도
남한산성 성곽에서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얼굴에도 붉은 빛이 물든다. 왠지 어떤 큰 파도 속에서 허우적 거리면서 산 느낌이 든다. 허우적 거릴 때도 있고 파도를 탈 때도 있었지만 네가지 파도가 수시로 몰려오는 것 같다. 일단 국가라는 큰 파도는 못 이기겠다는 생각이 든다. 국가의 힘은 세금이고 세금의 파도는 죽어서도 피할 수 없다. 또 다른 파도는 정치다. 기승전정치라고 하듯이 우리 일상 생활 모두에 영향을 미치는게 정치다. 그런데 그 정치라는 게 누가 더 잘하고 못하냐 그런 것이 아니라 세력들이 돌아가면서 먹는 듯 하다. 그러니 세력에 편성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서 또 다른 큰 파도는 돈이다. 거기에 휩쓸리면 고통스럽고 그 파도를 타고 다니면 즐겁다.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대는 사람 입장에서는 생존이 달린 고통이다. 그 파도의 힘은 너무 세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신앙이 있든 없든 학식이 많든 적든간에 파도를 넘어가지 못하고 시달리는 것 같다. 근데 인생이라는게 가만보면 죽음의 파도가 가장 센 것 같다. 그게 한번 와버리면 모든게 정리되어 버린다. 그게 덮치면 붙잡을 것이 없다. 권력을 붙잡을 것인가 돈을 붙잡을 것인가? 의지하고 잡을 게 없다. 그때는 참 무상할 것 같다. 동해안 바다에서 파도가 넘실대다가 바위에 부딪쳐 하얀 거품을 내는 걸 보면 인생이 바로 거품 같다는 느낌이 든 적이 있었다. 그래서 거품이 생겼다가 꺼지는 것을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걸로 비유하기도 한다. 인생이 한 순간이라는 의미를 알겠다. 근데 그 짧은 시간 속에서 네가지 파도에 휩쓸리면서 제대로 헤엄도 못 치고 쓸려가는 게 한 세상 인 듯 하다. 그래서 원효 스님은 급하고 급하다면서 인간 몸 받았을 때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했는지 모르겠다. 자기가 스스로 제도하지 않으면 누가 해주겠는가. 파도속에서 허우적대면 언제 제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 그러니 조금이라도 제 정신이 있을 때 그리고 젊었을 때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했지도 모르겠다.
‘허망한 세상 죄만 짓고 간다’라는 말처럼 산에 와서 산바람을 쐬고 기운을 얻고 싶어 하는게 그만큼 에너지가 고갈되었다는 의미다. 어느 노스님의 말처럼 죽을 때가 되니까 부도탑에 자주 온다는 말이 와 닿는다. 세상 사람들 사는 모습이 부처님 눈에는 절벽에서 떨어져서 간신히 동아줄을 잡았는데 절벽위에서는 휜쥐와 검은쥐가 밤과 낮을 번갈아 가면서 갉아 먹고 있어 언제 동아줄이 끊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생명줄이 끊어지기 전에 얼른 절벽위로 올라와야 되는데 마침 꿀통에서 꿀 한 방울이 떨어지는 거를 맛보고는 올라갈 생각은 못 하고 꿀 받아 먹으려고 정신이 팔려 있는게 중생의 모습이라고 했다. 그 의미가 와 닿는다. 죽음의 파도가 나에게 덮치기 전에는 항시 시간이 남아 있고 뭔가 더 할 것이 있고 여유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한번은 분명히 오는데 그게 30대냐 70~80대냐에 달려있을 뿐이다. 걸어 다닐 수 있고 앉아 있을 수 있고 생각을 돌려 볼 수도 있고 제정신을 가지고 있을 때 사람이 조금이라도 업을 소멸하는게 좋지 않냐는 생각이다. 인생은 고해라고 하듯이 사람으로 태어난 운명 자체가 수미산 같이 높은 산을 올라가야 하는데 태어나면서 짊어져야 할 무게가 20kg든 100kg든간에 지혜가 있으면 하나씩 하나씩 덜어 내면 되는데 오히려 짐을 더 무겁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곤 한다.
돈에 관한 사건을 오래하다보니 공직자들을 보면서 그런 걸 많이 느낀다. 알면 봐주고 모르면 칼같이 한다. 당연한 것도 오고가는 정(?)이 있어야 인정받는다. 공직자만큼 복전을 일구는 직업이 없건만 스스로 이를 팽개치고 교회나 절에서 복을 찾으려 한다. 공직자들이 업을 쌓지 않았으면 좋겠다. 본성에 반하는 짓만 안해도 우리나라는 좋은 나라 될 것이다. 꼭 공직 밖을 나와야만 비로소 느끼니 그게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