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태안사 3]
스님들과의 인연
태안사에는 선방이 있다. 청화스님이 태안사에 계실 때 많은 신도들이 보시하여 불사를 하였는데 그때 선방도 지었다고 한다. 수좌들이 공부 잘 할 수 있도록 목조건물로 잘 지어 놨다. 뒤로는 동리산을 포행할 수 있는 길도 있어 공부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청화스님이 한 번 안거를 들어가면 몇 년씩 결사를 해서 들어가다 보니 소문이 많이 난 곳이다. 하지만 청화스님이 떠난 이후로는 예전과 같지 않은 듯 했다. 오히려 그 잔재를 지우고 싶어한 듯 보였다. 원래 태안사는 화엄사 말사인데 청화스님이 들어와 선풍을 일으키고 불사까지 하였지만 청화스님 밑으로 출가하고자 하는 상좌가 많아져서 그런지 화엄사쪽에서의 견제가 있었지 않나 싶었다.한국 전통불교는 원래 문중이 없었다고 들었다. 조선총독부가 교구본사제도를 만들어 편하게 통솔하고자 했던 게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한다. 문중이 틀리면 스님이라도 절에서 기거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청화스님은 미국 팜스프링스로 떠났다. 거기에 사는 신도와의 인연으로 그곳에 선방을 짓고 안거를 하였다. 가끔 태안사에 와서 법문을 하셨는데 전생에 미국사람이었는지 잘 맞는다고 하였다. 상좌스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신심이 깊은 미국사람은 텐트를 치고 숙식을 해결하면서 법당에 예불하러 오기도 한다고 하였다. 청화스님 상좌들은 법명에 큰 대자를 지어 이름을 지었다. 당시 법당에서 기도한 스님 법명도 대원스님이었다. 나이가 나와 비슷해서 그랬는지 나를 잘 대해줬다.
비가 부슬부슬 와서 경내에 물안개가 자욱하게 낀 어느 날, 안개 속에서 스님과 어느 귀부인이 보였다. 젊은 스님이었다. 마치 어머니가 이제 막 출가한 자식의 마음을 되돌이키고자 애를 쓰는 듯 분위기가 무거워 보였지만 한편의 영화장면처럼 아직도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당시는 신참이었지만 지금은 그도 법람이 꽤 된 구참이 되었다. 그는 그후로 절 소임을 많이 봤는데 특히 템플스테이쪽으로 재능이 있었다. 외관이 준수하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옆에 끊이지 않았다. 사람을 잘 대한다고 수행력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법람이 30년 넘는 어느 수좌도 타고난 업을 바꾸기가 너무 힘들다고 하였다. 웬만한 수행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의미다. 수행을 못하면 직업이 될 뿐이다.
선방에는 하안거와 동안거가 있다. 각각 3달씩 정진을 하는 기간이다. 이 안거의 유래는 부처님 당시 그곳은 우기 때는 비가 많이 오기 때문에 탁발을 하면서 수행을 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때는 각지에 있는 수행승들이 한곳에 모여서 수행을 하였다. 이런 전통이 중국으로 불교가 전래되면서 겨울에도 서로 모여 한곳에서 정진을 하게 되었다. 중국불교가 우리나라로 전래되면서 동안거와 하안거를 하였다. 이 기간동안에는 스님들은 선방이든 강원이든 또는 기도를 하든 나름대로 수행정진을 해야 하며 만행은 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게 강제적인 것이 아니다보니 다니고 싶으면 다니고 안 다니고 싶으면 안 다녀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다. 그리고 학교처럼 시험이 있는 것도 아니다보니 한번 게을러지면 한없이 게을러질 수 있는 것이고, 제각각 공부하는 것이 다 다르다보니 어떤 이는 염불기도만 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선방만 다니고, 어떤 이는 강원을 다니고, 어떤 이는 암자에서 혼자 기거를 한다. 선방도 한철도 계속 끊이지 않고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한다. 10년 정도 열심히 하지 않은 스님이 어디 있냐고 한다. 선방에서 앉아 있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딴 길을 가기 마련이다. 속인과 스님의 경계가 옷으로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경우도 없다고 할 수 없다. 한창 고시공부를 하던 나의 입장에서는 뭔가 이상해보였다. 공부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어서 지도나 이정표가 있어서 딱부러지게 누가 이러라 저러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공부를 하다보면 왜 옛 사람들이 100일 정성을 드린다고 했는지 그 의미를 알수 있다. 그정도 기간이면 아무리 초짜라도 지극정성으로 공부하면 전체적인 윤곽과 감을 잡을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3개월 공부하고 3개월 방학하고 하는 식으로 하면 안 될 것이다. 공부도 할때 열심히 해야지 평생을 나눠서 하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고시공부하면서 자주 들었던 말이 ‘밑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간혹 선배들이 물어보곤 하였는데 딱히 뭐라 대답하기 어려웠다. 고시를 하면서 느낀 게 양동이 큰 걸로 확 부어버리면 물이 다 빠져나가더라도 시차때문에 바닥에 남는 물이 있을 것이고 그때 합격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독을 연못에 던져버리면 되는 걸로 느낀다. 물 속에 흠뻑 젖어있으면 저절로 채워지는 것이다. 뭔가를 이루고자 한다면 놀고자 하는 물에 자신을 던져버리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 장면에 너무 고정된 공부는 오히려 퇴보를 가져온다.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야 한다. 한 세계가 무너지는 일이 없다. 또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단지 알지 못해 불안할 뿐이라고 한다.
절에 있어보면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세상일을 스님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하다못해 자식의 대학교 과선택을 물어오는 사람도 보았다. 우리나라만큼 자신의 인생을 점에 의해 판단하는 경우도 없다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인생이나 세상이나 구별이 없고 같은 이치기 때문에 세상일도 물어볼 수 있는 거라고 하지만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스님들이 세상일을 얼마나 알고 있을 것인가 싶다. 당시 태안사에 행자를 하려고 들어 온 이가 있었다. 그는 머리를 깎고자 하였는데 당시 주지스님이 기도 잘하더냐고 물어보기에 열심히 한다고 말을 좋게 해줬다. 그는 며칠 후 머리를 깎고 행자생활을 하고 몇 개월 후 과정을 거쳐서 사미계를 받았다. 그 후 우연히 화엄사에서 만나 차 한잔을 먹다가 느낀 게 이제 막 행자수련원에 다녀와 계를 받은 이가 훈육본능에 좋은 말을 앵무새처럼 하면서 가르치려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갈 길이 멀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계를 받자마자 결국 본색이 드러나면서 은사로부터 멸빈통보를 받는 일이 벌어졌다. 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거였다. 수행자 자세가 돼 있지 않는 이가 형식만 머리를 깎고 가사 옷을 입고 스님 행세를 하는 이들을 박쥐 중이라고 서산대사는 선가귀감에서 그런 중이 되지 말 것을 경계해놨다.
모든 일에는 두가지 면이 있다. 겉에서 보는 것과 속에서 보는 것이다. 우리가 제도권내에서 일탈하려고 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당사자가 되기 위해서이다. 당사자가 되어봐야 모순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조직이든 제도권에 진입하는 길목이 있다. 세상일에 고민이 있으면 자기가 원하고자 하는 그 일에서 앞서간 경험자를 찾아가는게 현명한 지혜다. 부처님이나 하나님도 분명 그렇게하라고 할 것이다.
태안사에서 만난 스님들 중에 지금도 기억나는 스님들도 있다. 당시 청화스님 상좌인 대원 스님은 태안사에 있었을 때 100일 기도를 마친 후 미국으로 떠났다. LA에 삼보사라는 절이 있다고 하였다. 미국으로 가면 서부에서 알라스카까지 여행을 할 거라면서 나보고 같이 가겠냐고 물었지만 아직 세상을 나가본 적이 없어 마음을 내지 못했다. 몇 년 후 우연히 도봉산 청화스님 상좌가 창건한 절 기념식에서 스님을 봤는데 예전 얼굴이 아니었다. 수행자처럼 갸름한 얼굴이 아니라 살찐 얼굴이었다. 미국에서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한다. 하긴 미국에서 절집 음식을 해 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청화스님은 태안사 공양보살 한 분을 같이 모시고 갔다하지만 상좌스님이 있었던 절에는 음식을 따로 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직접 해먹어야 했다고 한다. 확실히 음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때 느꼈다. 수행처는 풍광과 기온이 중요한 것 같다. 뉴질랜드 남섬 풍광이 좋아서 그곳에 사는 신도가 선방을 지어 스님들을 초빙했는데 얼마 살지 못하고 스님들이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 나 역시 뉴질랜드에 가서 3개월 이상을 머무르지 못했다. 지리산 같은 곳에서 살다가 가면 아침 저녁으로 변하는 공기냄새와 녹음냄새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그냥 맑고 깨끗한 공기만 있는 곳에는 오래 있기가 힘들었다. 적응하면 된다하지만 우리나라 같은 곳이 드물다는 이야기를 스님들한테 많이 들었다.
독특하게 야인스님이라고 불리는 스님 두명이 있었다. 그분들은 선방에 입방하지 않고 태안사 부근에 토굴을 만들어 정진을 하였다. 마침 그 토굴을 선방스님들과 같이 갈 기회가 있었다. 조그만한 움막집 하나를 지어서 생활하였다. 야인수좌라고 불리는 이유는 하늘을 지붕으로 삼고 바위를 방바닥 삼아 수행한다고 해서 그렇게 불러진다고 하였다. 절집에는 다양한 캐릭터의 스님들이 많다. 그래서 공부를 대중들을 떠나서 하지 말라고 한 것 같다. 혼자 공부하면 삼천포로 빠질 위험이 있으니 대중 속에서 대중의 힘을 얻어 공부해야 한다고 하였다. 혼자 지내는 이들이 정신병에 걸릴 위험이 많은 이유이다. 세상과 담 쌓고 살면 정신질환에 걸린다. 수행자도 경계하라고 하거늘 수행과 관계없는 사람들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높이 올라가고 특권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그 날개가 꺾일 때의 외로움과 박탈감은 상당하다고 한다. 그래서 국회의원 끝난 사람이 가장 힘들다는 말이 나올만 하다. 지위나 권력을 위해 올인하면서 한평생 사는 것은 권할만한 일이 아니다.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나와야 한다. 갈 때는 사람들이 좋아라 한다. 자기 자리가 생겼으니까. 그런 점에서 취미를 꼭 가지라고 감사원의 감사위원 한 분이 후배들에게 충고해줬다. 퇴직 후 취미로 돈도 벌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나이 40세에 국세청에 들어가 45세 되는 해에 나왔다. 개방직 법무과장으로 5년을 재직하였다. 당시 국세청장님이 개방직 국장자리로 들어오라고 하였지만 그 뒤로 공직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가서 뭐 할래?”라는 물음에 “전 세계 네트워크를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청장님은 한동안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만 맹하게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국세청장실을 내려와 사무실에 앉자마자 서울청장님의 호출이 있었다. “어디 갈래?” “고향갑니다.” “광주?” “아닙니다. 마음의 고향입니다.” “….” 그로부터 16년이 지났다. 좌충우돌 살았지만 내 식대로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