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전 조선노동당 | 소련군정 남한적화투쟁지원 | 미군정의 대응 | ||||
1943 | 3 |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임시정부수립위원회 수립무산 | 협의대상선정기준 반쏘련세력 배제 | |||
1944 | ||||||
1945 | 9.20. | 소련위성국및괴뢰정권 | (스탈린지령) | |||
.12.28. | 반탁(한반도신탁통치5년결의) | ( 모스크바3상회의 | 당시 소련군정의 최고 책임자인 테렌티 스티코프1907∼1964년)일기에 명시 | |||
1946 | 1.2. | 찬탁 돌변 | ||||
2.8. | 소위 ‘소비에트민주화’조직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설립 | 토지개혁과 산업국유화 그리고 노동법령, 남녀평등권법령 등 근로자들의 민주주의적 권리와 노동조건을 보장하기 위해서 ‘민주개혁’을 수행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실질적인 <남북 분단정권>을 세운 | 미군정 (좌파언론)해방일보 정간 | |||
3 |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 통일국가설립 무산 | ||||
5. |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위조지폐 발행 6회 | (박지원 조부) | 미군정 위폐관련자 일당 기소 | |||
7 | 박헌영 6차 방북 후 신전술 전환 | 군중조직 동원 폭력투쟁 | ||||
9월 총파업 | 철도노조파업9.13. 용산 3,7009.19. 부산 7,0009.23. 철도기관 1000 | 적색 노동단체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약칭 전평) 총파업에 동조 가세전국범위로 파업확산 | 200만엔 지원및투쟁지침 지시 | 박헌영 등 공산당 간부 체포영장 발부 | 조선공산당’이 사실상 붕괴 되었다. | |
10.1. 오후 | 대구폭동 식량문제(콜레라 홍수 60배쌀값 폭등 )경북 경남 충청, 강원12월 전남 전북 | 미군정타파형식은 쌀을 달라도청가서 해결하자 박헌영선생체포령취소하라경찰 저놈들 죽여라경찰이 사람들을 죽였다더라 | 300만엔 지원 | |||
10.2. | 오전8시 | 경찰서 앞 수많은 군중 모임 | 발포사건 책임추궁 난동 | |||
오전9시 | 경찰에 의해 사망한 시체요(도립병원에 안치된 시체) | 대구의대 학생회장 최무학 및 학생 4명이 학생들 선동이미지 참조 | 나가자 | 대구경찰서 앞으로 | ||
오전10:30 | 공산당산하 시위주동세력들 1100명과 군중들 | 각 노조 농민조합 부녀동맹인민위원회, 민청 | 경북경찰청장 호소문이미지 참조 | 집어치워라사과하라 | ||
경북경찰청미군정경찰부장플레지어소령 무려해산명령 | 이성욱대구서장 거부 | 대구주둔미군사령관 포츠대령에게 병력동원요구 | 계엄령선포 안됨 이유로 거부 | 대구경찰서 점령후 긴급출동 | ||
11:30 | 경찰과 학생대표가 담판 벌이는 중 | 신재석경위가 인민공화국만세 | 행가래 | 공산당 경북도당책임자 장석우가 무장해제하면 해산하겠다고 함 | 대구서장이 무장해제하고 무기고에 총기 넣음 | |
12:00 | 학생대표”경찰이 백기를 들었습니다. 해산하세요” | 진짜 무장해제를 했는지 확인해보자 해산거부 | 갇혀있던 정치범도 석방하자 | 무기고 탈취 무장유치장수감자 풀어줌 | 대구인민위원회 보안부장 나윤출은 시위대100명씩 조를 짜서 시내로 배치 | |
경찰과 민족진영지도자들 색출하여 닥치는대로 학살 | 시위대가 학교마다 돌아다니면서 경찰이 양민들 학살한다고 소문 | 좌익계 400명에 중도계 중학생까지 1.5만명 합류 | 파출소경찰관 때려죽이고상황판에 못을 박아 시신 걸어둠 | 이미지 참조 | ||
오후3시 | 양민시신마을앞전시 | 보라 이 반동을 붉은글씨로 남겨놓음 | 주한미군사령관이 계엄령선포 | 화물차 버스 개인자동차 탈취후 22개 군청소재지로 50~100명씩 진출 | ||
10.3. | 새벽5:30 | 경북왜관 서장장석환 몽둥이 눈 혀다른4명 경찰 도끼 | 선산군(현 구미) 민전사무국장 박상희(박정희 셋 째형) 우익인사즉결처분 만류 | 경찰관 모두 유치장 감금 | 쌀150가마 탈취 | 진압군에 의해 사실됨 |
10.4 | 새벽3시 | 성주 도착 경찰서22명 산채화장휘발유뿌리다 충남기동경찰대오자 도주 | 상주 경찰5명 생매장 | |||
11.1. | 22곳 군청경찰서 중 영천이 가장 피해 끔찍 | |||||
1947 | ||||||
1948 | 4.3. | 제주폭동 | ||||
10.19. | 여순반란사건 | |||||
1949 | 빨치산 | |||||
2013. | 12 | 김명환 불법파업 400억 손해 | 김무성 박기춘 | 파업종료합의문 작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