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태안사] 2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느끼다
가을이 되고 감이 열렸다. 회회당 앞의 오래된 감나무에 홍씨가 무게를 못이겨 떨어지고 있던 바람 부는 어느 날 오후였다. 회회당 문밖으로 나와 계절을 감상하고 있었다. 스산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바바리코트가 바람에 날리면서 걸어오는 아가씨가 있었다. 옷깃을 스치는 바람에 낙엽이 뒹굴고 여인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가을냄새를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바로 내 옆을 지나갈 때 아무 생각없이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녀는 고맙다는 미소를 짓고 지나갔다. 가을이 익어 만산에 홍엽이 짙게 물드다 보니 보이는 것마다 좋아보였다. 사실 세계는 자기 마음이 반영된 것이다. 좋게 보면 좋은 것이고, 나쁘게 보면 나쁘게 보인다. 누가 나를 벌레같이 봤다고 하면 그건 그의 마음이 피폐해져 있다는 의미다. 피해망상증 환자는 항상 자기 눈으로만 사물을 본다. 그러니 자기 기분에 따라 세계가 왔다 갔다 한다. 특히 남의 허물을 잘 지적한다. 그만큼 예민하다는 의미다. 앞으로는 이런 정신질환자들이 많이 생길 것이다. 경쟁을 어려서부터 해오다보니 항상 만족을 못하고 결과를 내야하는 강박감에 시달리다 보면 결국 어느 순간 자기열등감에 피해의식만 커지고 사소한 것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다. 균형감각이 깨지면 정신질환자가 된다. 근데 겪어보지 않으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전만 하더라도 계절을 잊고 살았다. 한 해 한 해 계절이 숱하게 지나갔지만 계절을 느끼지 못했다. 그동안 고시공부에 쫓겨 살면서 가장 아쉬운 것이 계절을 모르고 살았다는 점이다. 봄이 되면 1차 시험이 있고 한달 뒤에는 2차 시험이 있었다. 시험보고나면 가을이 되고 스산한 바람이 불면 다시 마음이 초조해지고 겨울이 되면 도서관에 처박혀 시험공부하기에 바빴다. 시험에 떨어지면 겨울이 가고 봄이 되어 기온이 올라가 청춘남녀들에게 봄바람이 불어도 1차 시험을 새로이 준비해야 하기때문에 봄을 느끼기는 커녕 초조함의 연속이었고, 그야말로 1년 내내 시험일정에 쫓기면서 살았다. 고시생은 시험농사를 짓는 1년 농사꾼이었다. 1년 내내 그렇게 하다가도 결실을 못보면 실망을 하고 한동안 마음앓이를 한 다음 간신히 마음을 추슬러야 다시 책을 볼 수 있었다. 내 20대 청춘이 이런 반복의 연속이었다. 당시는 데모가 심해서 도서관에까지 데모하는 학생들이 쳐들어와 ‘시국이 어떤 시국인데 공부가 웬말이냐!’라고 구호를 외쳤다. 고시공부하는 이들을 벌레같이 보는 이들이 많았다. 젊어서 투사의 소리 한번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던 후배는 지금은 전혀 다른 소시민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반면에 나같이 규격화된 제도권으로 진입하고자 고시공부하던 젊은 청춘들은 고시합격 하나에 매달려 청춘을 보내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지만 대안이 없었다. 무슨 대안이라도 있으면 딴 거라도 했을 건데 산다는게 그렇게 힘든 거라서 그런지 공부의 끝이 어딘지도 모르고 과연 출구가 있기나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으니 할 수 없이 계속 시험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하기는 하되 나태한 것은 싫었다. 공부를 액세서리 같이 장식용으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떨어질 때도 열심히 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후회나 실망은 없는데 반해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으면 자신에 대한 실망이 더 커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열심히 최선을 다 했다고 생각들어도 자꾸 떨어지니 뭔가가 내 인생을 꼬이게 하는 매듭이 있다는 것만 어렴풋하게 느낄수 있었다. 깊어가는 가을을 진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게 이제는 그 매듭들이 어느정도 풀어지는가 싶었다. 자연의 숨결을 느끼고 호흡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새벽의 기운을 느끼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의 차분한 기운을 느끼면서 잠에 들었다. 회회당 앞의 높다란 감나무 가지 끝에 대롱대롱 걸린 홍씨들을 쳐다보고 긴 장대로 가지를 끊어 감을 따먹는 여유도 부리면서 지나가는 관광객에게도 맛보라고 하나씩 건네는 여유가 생겼다. 땅에 떨어져 뭉그러진 감에 묻은 흙을 털면서 한입 베어먹고는 너무 맛있어 해맑게 웃으면서 충족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연못 옆에 있는 잣나무의 잣을 청솔모가 좌로 한번 우로 한번 좌우로 몇번을 비틀어서 따는 모습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청솔모는 욕심이 많아서 배우자에게도 자기 것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가을에 먹이를 땅에 묻어놓고는 겨울에 어디에다 묻어났는지를 까먹는다고 하였다. 세상사람들의 삶이 꼭 청솔모를 닮아보였다. 만족할 줄 알면 항상 즐겁다는 말이 세상살면서 쉬운 게 아니다. 자칫 어정쩡해지기 쉽상인 것 같다.
태안사 암자의 비구니 스님
태안사에는 암자가 여러개 있었다. 가을이 깊어서 만추(晩秋)가 되어 낙엽이 수북히 쌓여 걷는 걸음마다 바스락 바스락 낙엽밟는 소리가 들리는 어느 날이었다. 태안사 경내로 아주머니 한 분이 무거운 박스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혼자 짐을 들고 가기에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비구니 스님이 있는 암자에 간다고 하였다. 30분 이상은 족히 걸어야 할 거리라서 짐을 여자 혼자 들고가기는 힘들어 보였다. 간혹 피자를 직접 만들어서 큰절로 대중공양하기도 한 스님이 있는 암자였다. 그동안 가보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는데 잘 됐다 싶었다. 짐을 대신 들고 같이 가기로 하였다. 사람 한사람만 다닐 수 있는 오솔길을 걸었다. 암자까지 계속 그런 길이었다. 낙엽이 수북히 쌓여있어서 걸을 때마다 낙엽소리를 듣는 게 좋았다. 특히 뒤따르던 아주머니는 너무 좋다고 가을 감상에 젖었다. 암자에 도착해보니 스님 한분이 계실 정도의 아담한 암자였다. 법당 하나에 방 하나였다. 비구니 스님이 반갑게 맞이해줬다. 아주머니가 스님에게 자주 다니는 신도였다. 스님을 직접 뵈니 나이가 어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이가 들어보이지도 않았다. 비구니 스님들은 제 나이를 알기 힘들다. 보통 10살 정도 보는 나이와 실제 나이가 다른 적이 많았다. 워낙 정갈하게 생활해서 그런 듯하였다. 어찌보면 비구니 스님들이 더 엄격한 것 같았다. 행자시절 고생을 많이 했다는 말을 여러 비구니 스님들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스님이 다과를 내줘 같이 이야기 하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차 한잔에 담소를 나누는 재미가 절에 있으면 상당하다. 누가 나를 반겨주고 법담을 나누는 재미는 절에 사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지금까지도 스님이 했던 말씀 중 잊어먹지 않는 게 있다. “남자나 여자나 도 닦지 않으면 혼자 살면 안 돼.” 내 얼굴을 보면 어리게 봐주지만 나이를 실제 알고 나면 꼭 결혼 안하냐는 질문을 하던 때였다. 그러면 항상 하는 대답이 일정했다. ‘밥먹을 능력도 없는데 결혼은 무슨 …’
아주머니는 결혼 생활이 별로였는지 나에게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라고 하자 스님이 ‘그러면 돼나’ 하면서 그런 말을 해줬다. 나이 먹어 보니 그분의 말이 다 일리가 있어보인다. 그 뒤로 그 말이 잊혀지지 않았다. 생존을 위해 살다보면 결혼한 것을 후회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하면 자식을 낳게되고 그러면 자식을 부양해야 하는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이고, 항상 그 의무에 지쳐가는게 머리에 그려졌다. 그러니 삶에 허덕일 때는 그런 구속이 없는 스님들과 널찍한 마당을 가진 절에서 사는 스님들이 부러워보인다. 나도 고시라는 삶에 지쳐있었기 때문에 결혼을 해야한다 하고싶다는 마음은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공부를 오랫동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생존의 능력도 전혀 없으면서 우선 시험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자신을 위로해주고 뒷받쳐 주는 의존의 대상을 만들기 위해 결혼을 했다가 생존의 굴레에 오히려 더 시달리는 고시생들을 여러번 봐왔다. 나 역시 결혼을 진짜 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가 바로 20대 말이었다. 이제 30대로 넘어간다 할 때 내 젊음과 청춘이 다 지나간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겼다. 그리고 누군가에 의존하면서 공부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생각뿐으로 끝났다. 어려우면 별 생각을 하게 되지만 결국 현실로 금방 돌아오게 마련이다.
외롭고 적적하면 몸에 병이 많아진다. 비구니 스님들도 병치레를 자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도 닦는 사람이나 혼자 산다는 말이 나이 먹으면서 이해가 된다. 역경계를 거슬러가는 힘이 없으면 혼자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라가 어지럽고 경제가 힘들다 보니 점점 더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벌써부터 결혼연령도 높아지고 결혼해도 아이를 갖지 않거나 출산해도 한명으로 끝내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인생 즐기고 살다 가면 된다는 식의 풍조가 널리 퍼져있다. 경쟁을 해도 결과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경쟁만 시켰지 대우는 비례해서 올라가지 않는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이런 풍조가 더 심해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