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덕은 복을 비는 것이고 공덕은 마음의 성품을 깨닫는 것이다. 복덕은 밑빠진 독에 물 붓기고 공덕은 샘에서 물이 솟아나는 것이다. 그래서 현인들은 복덕을 유루복(有漏法)이라 했고 공덕을 무루복(無漏法)이라 하였다.
양무제는 불사를 많이 하고 불교에 심취한 이였지만 그의 최후는 비참하였다. 반란군에 의해 감금되어 굶어 죽었다. 그게 그의 한계였다. 달마대사는 이를 진즉에 가르쳐주었는데도 그가 알아듣지를 못했다. 그래서 달마대사는 인연처가 아니다 생각하고 위나라 숭산으로 떠나 면벽수행을 9년 동안 하였다고 한다.
달마대사는 양무제에게 불사의 공덕이 크다는 질문에 대해서는 소무공덕(小無功德) 전혀 없다고 말했다. 무엇이 제일가는 성스러운 진리인가 질문에는 확연무성(廓然無聖) 성스러울 게 없다고 말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는 불식(不識) 모른다 라고 대답했다.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고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 하였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낸다는 것이다. 그게 나를 깨달아야 가능하다고 한다. 참선이 그래서 중요하다는 의미다. 참선도 따져서 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우주는 하나의 거울과 같아서 내가 맘을 낸 대로 그대로 반영된다고 한다. 거울에 흔적이 있을 리 없다. 창공을 나는 새는 흔적이 없듯이. 단지 범부는 마음의 흔적을 남긴다.
돈을 버는 것은 본능이고 쓰는 것은 예술이다. 예술을 훈련받지 않고 표현할 수 없듯이 돈을 쓰는 것도 젊었을 때부터 계속 훈련하고 체득해야 한다. 모으다가 쓰지도 못하고 국가가 가져가는 게 상속세다. 자식들 싸움만 부추키는 게 모은 재산때문이다. 돈을 버는 과정에서 치를 떨게 했던 흔적은 고스란히 본인이 가져간다. 복이 있어 돈을 모았더라도 밑빠진 독에 물붓기 식이다. 양무제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듯이 돈을 번 복이 있다해도 자신의 생사의 그물을 벗어나지 못한다.